[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9] 매천시장 “거기 불났따고 TV에 난리 났는데 너 집은 괴안나?” “어디에 불 났대요?” “모르는구나. 시장이라는데 불길이 어마해. 함 봐라.” 손언니 전화를 받고 TV를 켰다. ‘매천시장’이라는 글씨가 지나갔다. 누리글을 찾으니 불이 엄청나다. 곁님은 바쁜지 아직 모른다. 밤새 날벼락으로 뜬눈으로 보냈을 텐데, 우리가 가는 가게는 괜찮을까, 시장이 멈추면 어쩌지, 발을 동동거릴 사람보다 이 생각이 먼저 지나갔다. 사흘 뒤에 ‘시사’를 지낸다. 문중 살림을 이 사람이 맡기에 해마다 장을 보는데 오늘 미리 본다. 어제 불난 자리가 어떤지 궁금해서 나도 따라갔다. 시장이 워낙 커서 아무 일 없는 듯했다. 차가 빼곡하다. 비좁은 틈을 빠져나가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8번과 52번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바닥이 반질반질하고 넓다. 여기서 경매를 하고 한쪽으로 가게가 가득하다. 넓은 경매장 기둥과 기둥 사이로 맞은켠을 보았다. 가게는 타다 만 살림이 뒤범벅이다. 가게마다 과일이 새까맣게 타다 말았다. ‘119’라는 간판을 걸어둔 바깥쪽 한 군데만 불에 그을리지 않았다. 불이 붙었던 지붕은 떨어지거나 너덜너덜하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8] 나뭇잎 여름내 푸르던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꽃처럼 나뭇잎도 며칠 확 물들고는 찬바람에 후드득 떨어진다. 떨켜는 잎을 놓아 버리고 나무에 가지가 앙상하다. 우러러보면 힘줄처럼 파란 하늘에 뻗었다. 떨어진 잎은 멀리 갈 생각이 없는지 바닥에 떨어져 차곡차곡 쌓인다. 갓 떨어진 잎이 빨갛고 노랗고 주황빛으로 물감을 바른 듯 곱다. 나는 몸을 구부리고 잎을 줍는다. 은행잎 다섯 왕버들잎 열쯤 주웠다. 너무 고와서 돌에 얹어 보았다. 햇빛에 두니 더 붉고 노랗다. 벌레가 갉아먹은 잎줄기가 보이는 나뭇잎을 책에 끼워 두었는데, 이 고운 잎도 끼우려고 종이에 싸서 가방에 넣어 집에 왔다. 두꺼운 책을 꺼내 끼우려고 꺼내니 낮에 보았던 나뭇잎이 아니다. 그 붉던 잎은 우중충한 나무빛을 띠고 노랗던 빛도 어디 가고 나무빛 금이 뚜렷하다. 가장 곱게 떨어져 숨결이 아직 붙었는데 내가 이 빛을 빼앗았다. 나뭇잎은 나무 밑에 떨어져 마른 몸으로 나무를 또 돌본다. 그 자리에 떨어져도 바람과 해를 받아 물을 깊이 들이는 틈일 텐데, 자리를 옮기니 빛을 잃었다. 단풍나뭇잎은 그 빛 그대로 있지만 아직 곱기만 한 촉촉한 잎이 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7] 개미취 이틀 꽃구경을 했다. 햇살이 머리를 지날 무렵이라 얼굴이 익어도 꽃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꽃 구경하는 김에 꽃이 지면 아쉽지 않게 멧골 아닌 개미취 꽃밭으로 간다. 꽃이 마음을 빼앗아 간다기보다, 꽃을 보면 눈빛을 거쳐 온몸에 가슴에 허파에 꽃이 가득 핀다고 느낀다. 꽃이 질 적에 보기 흉하다고 여겨 멀리하려 했는데, 문득 눈을 돌리니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를 놓치겠구나 싶더라. 한 잎 두 잎 꽃망울을 품고 꽃송이 하나 피워내려고 줄기를 키우고 키워, 튼튼히 길을 낸 풀줄기가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온힘을 쏟아낸 꽃바다가 보고 싶다. 쑥부쟁이 닮은 바위취꽃이 비탈진 자리를 아름다이 밝힌다. 우리보다 먼저 온 줄이 길다. 나무 밑에 자리가 났다. 바로 앞에 보랏빛 꽃밭으로 들어간다. 어제 본 해바라기보다 이 꽃이 더 크다. 내 키를 훌쩍 넘어도 줄기가 꼿꼿하다. 사람이 낸 길을 따라 들어갔다. 깨금발을 디뎌도 꽃 너머 밭둑을 보아도 안 보인다. 이 좋은 꽃밭을 두고 저 건너 솔밭으로 간다. 아마 더 넓게 꽃바다가 있겠지. 해도 살짝 숨어서 우리를 보는가. 구름을 한 겹 가려놓았다. 솔밭으로 들어가니…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숲노래 우리말 : 얄궂은 말씨 손질하기 12 ㄱ. 나의 딸 소영이의 마음 한자말을 안 썼거나 영어가 불거지지 않더라도 우리글이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한글이어도 ‘나의’나 “소영이의 마음”처럼 일본말씨·옮김말씨를 쓰면 얄궂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처럼 옮김말씨를 써도 얄궂습니다. 어버이가 딸을 말할 적에는 “우리 귀여운 딸”이라 할 노릇이고 “귀여운 딸”이라고만 할 수 있습니다. “자란다고”처럼 단출히 끊거나 “자라는 줄”처럼 손질해 줍니다. ㅅㄴㄹ 나의 귀여운 딸 소영이의 마음이 이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 우리 귀여운 딸 소영이 마음이 이처럼 무럭무럭 자란다고 생각하니 → 귀여운 딸 소영이가 마음이 이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줄 생각하니 《봄을 기다리는 날들》(안재구·안소영, 창비, 2021) 34쪽 ㄴ. 개의 배회는 계속되었다 배회(徘徊) : 아무 목적도 없이 어떤 곳을 중심으로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님 계속(繼續) : 1. 끊이지 않고 이어 나감 2. 끊어졌던 행위나 상태를 다시 이어 나감 3. 끊이지 않고 잇따라 맴돌거나 떠돌거나 돌아다닌다면 ‘맴돌다’나 ‘떠돌다’나 ‘돌아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파란하늘’하고 ‘푸른들’ 말꽃삶 3 파랗다 푸르다 빛깔말 가운데 ‘파랗다·파랑’이 있고, ‘푸르다·풀빛’이 있습니다. ‘-ㅇ’으로 맺는 빛깔말로 ‘파랑·빨강·노랑·하양·검정’이 있고, ‘-빛’으로 맺는 빛깔말로 ‘풀빛·보랏빛·잿빛·먹빛·물빛·쪽빛’이 있습니다. 파란하늘 푸른들 ‘파랗다’는 하늘빛을 가리킵니다. ‘푸르다’는 들빛을 가리킵니다. 하늘은 바람으로 가득합니다. 아니, 하늘은 온통 ‘바람’이라 할 테지요. 이 바람은 여느 자리에서는 ‘바람’이되, ‘마파람·휘파람’처럼 다른 말하고 어울리면서 ‘파’ 꼴입니다. 바람 바다 바닥 바탕 ‘파랑·파랗다’는 ‘바람빛’이라고 할 만합니다. 바람에 무슨 빛깔이 있느냐 할 텐데, ‘바람빛 = 하늘빛’이요, 우리 눈으로는 ‘파랑’으로 느낍니다. 다만, 이 파랑이라는 하늘빛이 비추는 ‘바다’는 ‘쪽빛’으로 물들기도 하되, 바다나 물에 바닷말이나 물풀이 끼면 ‘푸르게’ 물들기도 합니다. 바다는 모름지기 ‘물빛’이거든요. 담거나 비추는 결에 따라 빛깔이 다릅니다. 곰곰이 보면 하늘도 해가 물드는 결에 따라 빛깔이 달라요. 동이 트면서 희뿌윰하지요. 얼핏 하얀하늘이 되고, 붉은하늘도 되며, 보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곁노래 곁말 36 수다꽃 사내는 수다를 떨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사내가 말이 많으면 “계집애가 된다”고, 사내는 점잖게 말없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길게 말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나 둘레 어른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만 입을 다물라고 나무랐습니다. “계집애처럼 수다나 떨고!” 하면서 굵고 짧게 호통이 떨어집니다. 잔소리로만 들린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노라니 ‘수다는 좋지 않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또아리를 튼 듯해요. 그러나 ‘말없이 묵직하게 있어야 한다’는 말이 몸에 배고 나니 막상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 말이 안 나와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말할 자리에서 말을 하는 길’을 처음부터 짚으면서 혼잣말을 끝없이 읊었습니다. 새벽에 새뜸(신문)을 나를 적에 주절주절 온갖 말을 뱉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밤에 잠자리에 들 적마다 마음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말빛 곁말 35 꼰대 스무 살에 인천을 떠나던 1995년까지 배움터에서 ‘꼰대’라는 말을 듣거나 쓴 적이 드물지 싶습니다. 몽둥이로 두들겨패던 어른한테 ‘미친개·그놈·x새끼’ 같은 말을 쓰는 동무는 많았습니다. 싸움터(군대)로 끌려가서 스물여섯 달을 살던 강원도에서도 이 말을 못 들었어요. 이러다 2000년에 DJ.DOC란 이들이 부른 〈포졸이〉부터 ‘꼰대’란 말이 확 퍼졌다고 느낍니다. ‘꼰대’는 너무 꼬장꼬장하거나 비비 꼬였구나 싶은 사람을 가리킬 적에 쓴다고 느껴요. 꿋꿋하거나 꼿꼿하게 버티는 결을 나타낼 때도 있으나, 이보다는 ‘꼬여서 틀린·뒤틀린·비틀린’ 결이 싫다는 마음을 드러내요. ‘장대·꽃대·바지랑대·대나무’에 쓰는 ‘대’는 가늘면서 긴 줄기나 나무를 가리키고, “‘대’가 곧은 사람”처럼 써요. 꼬인 채 단단하니 제 목소리만 내려는 사람인 꼰대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6] 해뜨는 새벽 이레가 지나도록 절룩거린다. 발을 디디면 무릎이 기우뚱 쏠린다. 이대로 숲을 오르기엔 안 되겠고 숲은 가고 싶다. 930미터 감악산에 해돋이를 보러 간다. 차로 올라 가면 조금만 걸으면 된다. 새벽 네 시에 나섰다. 새해도 아닌데 해돋이를 보려고 차에서 자는 사람도 있다니 차가 밀리지 않게 서두른다. 새벽길이 캄캄하다. 앞차 꽁무리 불빛하고 앞을 밝히는 불빛이 어둠을 뚫는다. 안개가 자욱하다. 달릴수록 바깥이 춥다. 7도이다. 여섯 시에 닿았다. 어둑하지만 맑은 하늘이다. 구름띠 너머 발간 빛이 살짝 비치니 곧 해가 솟아오를 듯하다. 차를 세우는 동안 구름띠가 곱게 물든다. 바다인지 산인지 헷갈리는 너머는 샛노란 빛이다. 바람이 찬데 놓치지 않으려고 빨리 걸었다. 무릎이 덜컹한다. 겨우 꼭대기에 올랐는데, 이곳이 아니란다. 돌계단을 내려와 숲으로 간다. 벌써 저만치 따라갈 걸음인데 오늘은 무릎이 말썽이다. 이러다가 해뜨기를 못 보겠다 싶어 마음이 탄다. “먼저 가서 사진 찍어요.” 아무래도 오르기를 그만둘까. 섰다가 폭 쌓인 산을 뒤덮은 구름바다를 본다. 저 구름 밑에는 우리가 지나온 안개가 자욱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5] 돌담집 소꿉동무하고 멧골을 오른다. 그제 못 간다고 했지만, 밥이나 먹자고 한다. 곁님이 문중에 ‘시사’ 지내러 가서 없으니 일꾼 밥만 바꾸어 준다. 쪽파를 한 단 까서 여섯 그릇에 담는 동안 일꾼이 이른 밥을 먹고 나온다. 곧 나서면 12시 반에는 닿겠다. 마을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길가에도 주차장에도 차가 가득찼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 걷다 보니 마을에 잔치가 있는 듯하다. 길가에 수국꽃을 꾸며놓았다. 누가 짝을 맺는구나. 동무들이 내려오려면 좀더 있어야 하니, 마을 건너편 비스듬한 산길로 갔다. 살짝 오르막인데 오늘은 걷기 힘들다. 마을을 돌고 싶은데 참고 돌담집 뒤쪽에 통나무에 앉아 기다린다. 그늘이 추워서 해받이에 앉았다가 다시 그늘에 앉았다.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동무들이 내려왔다. 돌림앓이로 못 만났으니 두 해 만에 얼굴을 본다. 주먹으로 마주치며 아는 척하고 손을 잡는다. 무척 반갑다. 나는 술도 잘 못 먹고 말도 재밌게 하지 못하는데 낀다. 시인이라고 떠받든다. 옆에 앉은 무환이가 책값을 꺼낸다. “모두 주소 정화한테 보내라.” 시원하게 말했다. 시집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44] 짜장면 몸이 말한다. 생각이 움직인다. 어떤 말이 맞을지 모르나 둘을 몸으로 느낀다. 몸이 말할 적에는 생각이 꾸물할 틈 없이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꾸 말하라고 떠밀리듯 했다. 내가 받아들일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입밖으로 내지만, 몸은 뭔가 눈치를 챘다. 신을 신으면서 나도 모르게 “오늘은 자꾸만 짜장면이 먹고 싶지.” 하고 뱉었다. 마침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아는 분이 “버스 타는 데까지 좀 태워 줄 수 있어요?” 하고 묻는다. 버스 타는 곳에 내리고 건널목을 건너면 지하철 타는 곳에 한 분을 내리기로 했다. 차를 타고 “오늘 짜장면이 자꾸 먹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우리 먹을래요?” 했더니 좋아한다. 차를 몰고 나왔다. 넓은 이층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들어 따뜻하다. 창가에 닿을 듯한 나뭇잎이 노랗고 붉게 물을 들인다. 짜장면을 먹으러 왔으니 나는 짜장면을 시켰다. 나이가 여든이 훌쩍 넘으신 분은 곱빼기를 시킨다. 종지 그릇에 두 숟가락쯤 담긴 밥이 나왔다. “밥 나올 줄 알았으면 곱빼기 시키는 게 아닌데.” 하신다. 나는 그릇을 싹 비웠다. 짜장면에 소고기가 들었대서 남기지 않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