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3] 따스하다 문 앞에서 작은딸을 보내고 들어오는데 신발 벗던 아들이 ‘따뜻하네’ 하고 폴짝 뛰면서 방으로 간다. 작은딸이 짝을 맺고 첫 설을 우리 집에서 쇠고 갔다. 하룻밤 자고 갔지만 남겨놓은 따뜻함은 크다. 우리는 둘이 있다가 애들이 오면 잠자리가 뒤죽박죽이다. 나야 책마루(서재)가 있어서 누가 오든 안 오든 아무렇지 않다만, 곁님이 늘 비켜준다. 작은딸이 짝을 맺은 한 달이 조금 넘는데 새사람을 마루에 재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우리 딸도 시집에 가면 잠자는 일을 걱정하는데, 사위도 우리 집에 오면 마찬가지이다. 아직 화장실 쓰기가 버거울 테니 큰방을 내준다. 큰방을 쓰던 큰딸은 아들 방으로, 아들하고 곁님은 마루로 하기로 했다. 어서 이불을 바꾸고 방을 치우려고 널어놓은 큰딸 짐을 닫는데 한바탕 날선 말이 오갔다. 큰딸이 불쑥 투덜거렸다. 곁님은 작은딸하고 사위가 왜 큰방을 써야 하는지 못마땅해 했다. 이 꼴을 보자, 갑자기 내 안에서 확 터졌다. 지난 섭섭한 일들이 한꺼번에 스쳤다. 곁님이 애들 앞에서 나를 깔보는 듯한 말은 안 하면 좋겠는데,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언뜻 나왔다. 큰딸은 짐을 옮기면서 “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2] 칼 안 쓰는 날 “야야, 칼 쓸 일 있으면 오늘 다 장만하거라.” “왜요, 아버님?” “칼 안 쓰는 날이다.” “사과하고 배는 어떻게 해요?” “그건 작은 칼로 도려내고, 큰 칼은 쓰지 마래이.” 달걀을 노른자 흰자를 따로 부쳐서 채썰었다. 무와 고기도 미리 손질해서 그릇에 담았으니 두부만 숟가락으로 으깬다. 다진고기에 참기름을 부어 볶다가 두부를 넣고 으깬다. 김 두 장을 비벼서 가루로 뿌렸다. 사과하고 배를 깎는다. 열 시쯤 되면 써도 된다고 했는데, 작은 칼이니 괜찮겠지. 시아버지는 절에서 받은 달력을 걸어 두고 본다. 절집 달력에 짐승이 띠이름대로 나오던데, 어떤 짐승을 보고 칼을 쓰지 말라는 걸까. 작은 칼로 깎았지만 크든 작든 칼인데 찜찜하다. 시어머니는 명절날이나 제사에 걸리면 미리 사과나 배도 깎아 놓고 그날은 칼을 멀리했단다. 미리 챙기는 일도 안 쓰는 일도 마음이 쓰일 텐데. 아직도 달력을 보고 몸소 따른다. 칼은 쇠고 쇠는 돌에서 나오고 돌은 흙에서 나왔을 터. 이래저래 따지면 걸림돌이 얼마나 많을까. 날카로운 칼은 어떤 뜻으로 삼가려나. 칼은 갈고 갈아서 무엇이든 자르고 끊는다. 잘 쓰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6 ― 책수다 2022년 12월 27일 저녁 여섯 시 서울 방배동 메종인디아 트래블앤북스. 시골에서 나고자라면서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로 책수다를 편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기 앞서 떨리고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했는데 막상 ‘작가님’ 자리에 처음으로 앉으니 떨리던 마음이 걷혔다. 그래도 미리 적어 온 글을 읽었다. 이미 몸에 아로새긴 삶인데 미리 안 적어 왔으면 말을 못 했을 뻔했다. 둘러앉은 분들도 저마다 어릴 적 시골 얘기를 한 올씩 풀어놓았고 우리 딸아이도 사이에서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 혼자 말이 너무 많았을까. 북토크는 처음이고 북토크 주인공도 처음이다. 그래 수다를 떨었다. 책수다였으니 말이 좀 많은 쪽이 나았으리라 부끄러운 얼굴을 감춘다. 서울역으로 가서 대구 기차를 타니 확 졸음이 쏟아진다. 내릴 때까지 곯아떨어졌다. 2022. 12. 27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5 ― 스물둘 열 몇 해 앞서 장만했지만 좀처럼 입을 길 없던 비싼값 치른 꽃치마를 챙긴다. 옷이 구겨질까 다칠까 살살 달래면서 종이자루에 담았고 택시를 탄다. 스물두 해 만에 와 보는 사진관이다. 챙겨 온 꽃치마로 갈아입는다. 사진을 찍고서 꽃치마는 다시 종이자루에 담는다. 투박하고 값싼 옷으로 갈아입는다. 2022. 07. 22.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4 ― 햇빛따라 누리책집에 내 책이 들어갔다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궁금해서 들어가서 보고 잘 있나 싶어 또 가서 보고 좀 팔리나 싶어 다시 가서 보고 자꾸자꾸 들여다본다. 누가 사주는지 몰라도 35, 29, 30, 20, 14 널을 뛰는 듯하지만 무슨무슨 자리에 올랐다는 말에 덩실덩실 궁둥춤이다가 끙 이맛살을 찡그린다. 내가 내 책을 사면 저 자리가 더 올라갈까? 두근두근 내 책을 내가 사 본다. 이튿날 어떤 자리일까? 아니 이렇게 내 자리를 높이면 거짓말 아닌가? 아이 셋을 낳아 돌보며 아이들더러 거짓말 말고 참말 하면서 착하게 살라 가르치지 않았나? 이미 누리책집에서 산 책은 되돌릴 수 없는 짓. 부끄럽구나 어미 된 사람으로서. 2022. 12. 26.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2 ― 글삯 일을 해서 아이를 돌보았고 일을 해서 집을 마련했고 일을 해서 자가용을 들였고 일을 해서 옷을 산다. 일만 하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다가 우리 세 아이한테 어떤 어머니로 남을까 문득 궁금했고 어쩌면 세 아이는 모두 어머니한테도 삶이 있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글을 배우기로 했다. 학교는 다녔지만 학교를 다녔을 뿐, 내 하루를 내 손으로 쓰는 글살림을 배운 적은 없다. 강의나 문학이나 수필이나 에세이 …… 어려웠다. 그러나 뭔가 멋있어 보였다. 그런데 문학이나 수필이나 에세이 여기에 시를 쓰려고 하니 처음 글을 배워서 쓰려던 뜻하고 멀어졌다. 아니, 난 우리 세 아이한테 어머니 삶을 들려주려고 글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나? 이름을 내거나 이름을 얻으려고 시인이나 수필가 같은 이름을 바라려고 글을 배우지는 않았는데? 글을 써서 돈을 쥘 수 있을까? 누가 내 글을 내 책을 사줄는지 모른다. 아무도 안 읽고 안 사줄는지 모른다. 첫뜻으로 돌아가련다. 세 아이한테 들려주고 곁님한테 들려주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엄마, 아빠, 내가 이렇게 글을 썼네. 함 보이소.” 하고 띄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1] 말랑감 상주 푸른누리를 지난달에 다녀왔다. 상주 시내에서 한참 먼 멧골에 깊이 깃든 그곳은 숲집 같았다. 그날 그곳에서 얻어온 말랑감이 남았다. 빛깔이 곱고 말랑한 감을 먼저 골라 먹다 보니 까맣고 흉이 난 감만 남았다. 어찌할까 하다가 까치밥으로 삼기로 한다. 물을 큰 그릇에 옮긴 날 말랑감을 하나 놓았다. 아침에 문을 열어 빼꼼히 보니 쪼아먹은 구멍이 났다. 물을 더 붓고 감을 둘 또 놓았다. 까치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두리번거린다. “이 물을 누가 놓았지? 감은 어디서 떨어졌지?” 하는 듯했다. 까치는 물을 먹을 적에도 모이를 먹을 적에도 소리를 낸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면 조용히 몰래 먹어야 할 듯한데, 오히려 소리를 낸다. 요즘 내 귀에 이 소리가 말로 들린다. 살피는 몸짓이 말 같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어디 있어요?” 같은 소리가 들리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가리개 곁에 숨어서 본다. 큰 까치가 오니 어린 까치가 날아갔다. 큰 까치는 넓은 물독에 들어갔다. 꼬리가 잠기지 않는다. 어느새 날아가고 어린 까치가 왔다. 물을 먹고는 감껍질을 한 입 물고 날아간다. 누굴 줄까. 저 어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딸한테 9 ― 수밭고개 1 머리가 돌처럼 딱딱하다 자꾸 잠이 온다 집을 나선다 멍하니 대구 시내를 벗어난다 골프장 알림판이 보인다 고개를 돌린다 못가에 선다 둥그런 보랏빛 꽃을 본다 빗물이 내려앉은 꽃잎이다 잔디밭 앞에서 할매가 나물을 캔다 바닥만 보며 고갯길을 오른다 다리를 쉬려고 허리를 편다 고개를 들어 둘러본다 대구 시내에 집집이 빼곡하다 삣쫑삣쫑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래 이곳엔 새가 있지 2023. 01. 09. 숲하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0] 사위 온다고 “엄마, 우리 내일 옷 편하게 입고 가도 되나?” “그래, 그래도 깔끔하게 입고 절은 해야지.” “나도 같이 하면 되나?” 지난해 설에 사위가 처음 우리 집에 왔다. 처음 오는데다가 그날이 설날인데도 세배를 하지 않았다고, 처음 온 애한테 말도 걸지 않고 싸늘하게 굴었다. 이잔치를 치르고서 처음 우리 집에 온다. 잔치를 치르던 무렵에 사위가 엉덩이를 수술하느라 노래를 듣지 못했다. 우리는 딸이랑 사위가 힘들게 신혼여행을 갔다가 잘 쉬지도 않고서 우리 집으로 오면 또 덧날지 몰라, 좀 쉬엄쉬엄 다 낫거든 오라고 했다. 여행 때도 안 좋아 힘들었다는데, 돌아와서 바로 다시 수술했단다. 아직도 거즈로 닦는다. 며칠 더 있으면 한결 나을 텐데, 저희들도 시집 인사를 미루기엔 눈치가 보였나. 내가 눈치를 주었나. “엄마 나 원서 네 군데 냈잖아, 다 붙었어. 처음 붙은 데가 가장 좋아서 다른 세 곳에는 못 간다고 했어.” 자랑하는 딸을 보니 이 아이를 걱정하던 어린날 딸이 아니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나한테 사랑을 가장 못 받았을지 모르는 작은딸인데, 작은딸은 동생을 오히려 귀여워했다. 작은딸이 나서서 동생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59] 딸이 온다고 이틀 뒤에 작은딸네가 온다. 짝을 맺으니 사위가 덤으로 따라온다. 딸은 따라오는 일이 있는 이름 같다. “장모님!” 하고 부르는 말이 처음에는 낯설다가 이제는 살갑다. 처음 인사 왔을 적에는 목소리에 꽤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부드러운데 저도 나처럼 낯설 테지. 그나저나 무얼 해야 하나. 그제는 둘이 덮을 이불을 빨고 어제는 화장실 구석구석 씻고 오늘은 떡을 맞추고 고기집에 갔다. 서로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딸 잘 봐달라고 조금 흉내만 낸다. 엄마가 마음 쓰는 줄은 모르고 받으면 마음이 느긋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딸이 벌써 남이 된 듯하다. 장만했니 안 했니 말을 먼저 하지 않다가 하룻밤 자고 갈 적에 짠하고 차에 옮겨 실어 주어야지. 딸아이는 아직 이쪽 일터를 매듭짓지 않아서 살림살이가 어설프다. 일터를 옮겨야 해서 새해 첫날 면접을 보았단다. 우리 딸은 처음부터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유치원이 낫다고 해서 이제껏 유치원에서 일했다. 이 유치원에서는 수녀님하고 일한다. 이 유치원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결혼을 하면서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