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0] 밤 한가위에 마을 동무와 금성산에 올랐다. 풀을 헤치고 길도 아닌 비탈진 자갈을 밟고 오른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돌을 밟다가 돌이 굴러떨어져도 올랐다. 더 올라갔다가 내려올 적에는 썰매를 탈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길이 가팔라 중턱에서 멈추었다. 끝내 끝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내려오는 길에 밤을 서리했다. 밤나무 곁에 떨어진 밤을 까니 굵었다. 나무를 흔들어 밤송이를 떨어트렸다. 쩍 벌어진 송이를 두 발로 밟아 작대기로 벌려서 알을 꺼냈다. 빈손으로 왔다가 주머니 가득 넣거나 품에 넣었다. 떨어진 밤만 주웠더라면 떨리지 않았을 텐데, 나무에 달린 밤을 흔들어서 따고 보니 덜컥 무서웠다. 작은오빠 동무들이 아랫마을 길가에 있는 능금밭에 들어가 재미라며 능금을 따서 먹다가 밭임자한테 잡히자 경주로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능금값을 물어준 일이 있었다. 남이 심어 놓은 밤을 몰래 따서 밭임자가 알면 얼마나 속쓰리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 일이었다. 집까지 오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밤은 가시를 감싸서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가로챘다. 밭임자는 멧짐승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9] 재 우리 집 아궁이는 네 군데가 있어 돌아가며 재를 퍼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보드라운 재가 쌓인다. 나는 재를 퍼내는 심부름이 싫었다. 가루가 날고 무거운 망태를 들고 높은 부엌문을 넘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재가 가득 차면 삽으로 퍼내야 아궁이에 넣은 나무가 솥바닥에 닿지 않는다. 새끼를 꼬아 만든 무거운 삼태기에 재를 퍼담아 거름에 쏟아붓는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는 재로 그릇을 씻은 적이 있다. 짚에 재를 담아 물을 부으면 노르스름한 물이 나왔다. 그 물로 빨래를 했다.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마당을 기어다니는데, 옷에 흙먼지가 붙고 더러웠다. 비누는 없고 잿물로 빨아도 한복 깃을 달 풀이 없어 이웃한테서 얻어 손질했다. 어머니가 갓 시집 왔을 때는 쌀도 없어 밥풀도 없었다. 아버지는 큰집살이 하면서 밥 먹을 적에 쌀밥을 골라내서 상 밑에 두었다가 들이나 밭에 갈 적에 어머니를 주면 어머니는 그 밥알로 할아버지 저고리 깃을 붙이고 바느질을 해서 입었다. 아버지는 임자 몰래 먹느라 눈치를 보았다. 어린 날에는 보리 짚단에 불을 지펴 밥을 했다. 산에 나무가 자라는 대로 땔감으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이야기 78] 까마중 어머니 말로 나는 어릴 적에 입이 짧았다고 했다. 잘 안 먹었다는 말인데 잘 안 먹었는지 아니면 먹지 못했는지 모르나 아마 먹을거리가 없고 있는 거라곤 어린 내 입맛이 없어서 그런지 모른다. 밭둑이나 풀밭에는 곡식과 다르게 지심(풀)이 있었다. 고추잎처럼 보드랍고 얼핏보면 머루처럼 보이는 말랑한 열매가 까맣게 익었다. 우리는 ‘개멀구’라 하고 어머니는 ‘강태’라 했다. 말랑한 열매는 진주목걸이 알만한 게 살짝만 눌러도 터져서 옷에 튄다. 토마토를 잘랐을 적에 안 익은 물컹한 푸른 물이 툭 터진다. 나는 이 열매는 지심이라고 소나 먹는 줄 알고 잘 먹지는 않았다. 달콤하면 잘 먹었지 싶은데, 까마중은 가지 맛이 났다. 밍밍하고 미원 맛나는 이 열매를 먹고 나면 울렁거리고 입안에 남는 냄새가 싫었다. 머루포도 알과 크기도 비슷한데 맛이 달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달고 새콤하다는데 소먹이러 가면 밭둑이나 논둑에서 자주 보지만 아주 배고프면 따먹었다. 그래도 심심풀이로 놀면서 따먹는다. 까마중처럼 새까만 약을 껌처럼 떼어 납작하게 눌러 다리에 붙인 적이 있다. 어린 날에 다리에 종기가 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7] 머루 앞집 우물가에 포도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자주빛으로 익어 갈 무렵이면 포도가 먹고 싶어 군침이 돈다. 앞집에는 마을사람이 드나들지 않았지만 나는 앞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무자위에 물 한 바가지 붓고 길어서 물을 받은 뒤 보는 사람 없을 적에 머리맡에 닿는 포도를 몰래 몇 알 따먹는다. 포도나무가 머리맡에 없었다면 따먹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 손이 닿는 수돗가에 있으니 물 뜨러 가면 먹고 싶다. 앞집 할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눈을 부라려 무섭지만 나는 할아버지 없을 적에 갔다. 큰집에도 우물가에 포도나무가 우거졌다. 나는 포도가 너무 먹고 싶어 샘 둘레를 돌다가 잘 익은 작은 송이를 몰래 따서 뒷산 뒷길로 먹으면서 집으로 넘어왔다. 하루는 어머니 따라 외가 친척 집에 갔다. 가음 장터에서 버스에 내려서 한참을 걸었다. 땡볕에 땀을 흘리며 닿은 집은 마루가 붙어 시원했다. 마루에 둘러앉아서 청포도를 실컷 먹었다. 새콤하지 않고 달콤한 청포도를 처음 맛보았다. 우리 집은 우물도 없고 포도나무도 없지만, 머루를 실컷 먹었다. 금서 칡덤불 사이로 머루가 주렁주렁 있었다. 포도보다 알이 작고 엉성하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5] 등목 칠팔월이면 볕이 뜨겁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등목을 했다. 웃옷을 홀라당 벗고 바닥을 짚고 엎드리면 나는 바가지로 찬물을 퍼서 허리띠 위에서 물을 부으면 목덜미로 떨어졌다. 우리 집은 땅에서 퍼올리는 물이 아주 차갑다. 비누를 등에 바른 뒤 찬물을 붓는다. 아버지는 ‘아, 시원하다.’ 하고 흐느끼며 목을 든다. 나는 허리춤 옷에 물이 닿지 않게 살살 또 붓는다. 작은오빠 등에도 물을 붓고 어머니 등에도 물을 부어 주었다. 할아버지 등목은 내가 많이 해주었다. 하기 싫어도 할아버지는 몸이 힘들어서 땅바닥에 겨우 엎드려 머리를 내민다. 나는 한참 뒤에서야 방에서 나와 할아버지 목을 씻기고 등에 물을 부어주었다. 할아버지 목은 주름이 많고 미끌미끌해서 기름을 만진 것처럼 손까지 미끌미끌해서 찜찜하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라서 목이 쭈글쭈글하다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 닮았는지 젊은데도 목에 주름이 촘촘한 빗금을 친 듯 굵었다. 어머니하고 나는 저녁이면 골짜기에 갔다. 우리가 살던 언덕집 밑 도랑에는 금성산에서 물이 흐른다. 바위가 많아 비렁에 앉아 씻는다. 골짜기 물은 깨끗했지만, 산수유나무가 우거지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4] 멱감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점낫골 못은 우리 헤엄터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집에 사는 옥이 언니네 뒤로 등성이를 하나 넘어 내려간다. 낭떠러지가 있어 좁은 비렁길을 건널 적에는 몸을 옆으로 돌려 건너는데 낭떠러지를 내려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풀을 잡고 살금살금 건너 못둑에 이른다. 걸어오면서 주워온 납작한 돌로 물수제비 뜬다. 마을에 넓은 내가 없어 물수제비는 못에서만 던진다. 몇 판 풍덩 빠지고 나서야 한두 판 수제비가 뜬다. 팔힘이 좋은 오빠가 던지면 돌이 물을 통통 튕기며 멀리 날아간다. 나도 몸을 옆으로 돌리고 낮추어 물하고 거의 반듯하게 엎드려 돌을 힘껏 던지면 바느질 뜨듯이 징검다리처럼 날아간다. 우리는 물수제비가 날아간 건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남자들은 바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든다. 여자얘들은 얕은 자리를 맡고 물가 바위 곁에서 손을 바닥에 짚고 물장구를 친다. 물이 얕아서 흙물이지만 물놀이는 신난다. 조금 들어가 보려고 해도 바닥이 고르지 않아 푹 빠지기도 하고, 뱀이 나올까 무서워서 작은 바위 곁을 떠나지 못했다. 남자들은 못 끝까지 건너며 놀기도 했다. 여자애들도 못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6] 뱀알 마을 밖 느티나무를 지나 배움터로 갔다. 느티나무에서 오십 미터쯤 되는 자리에 오른쪽은 논이고 왼쪽은 금성산에서 뻗은 등성이가 끝난다. 나지막해서 산으로 해서 모퉁이에 자리잡은 무덤으로 미끄럼틀 타며 내려오고, 돌아올 적에는 무덤 뒤로 낑낑거리며 올라와서 느티나무 자리로 빠져나온다. 오르고 내려가는 자리부터 살짝 내리막길이고 멧자락은 검붉은 돌이 겹겹을 이루고 손으로 건들면 멧길 돌이 떨어진다. 흙이 없는 돌틈은 늘 물을 머금는다. 떨어지는 물이 골로 흐르고 좁은 물길 따라 풀이 자란다. 나는 그 자리를 지날 적마다 뛰었다. 하루는 배움터에서 돌아오던 길에 뱀을 만났다. 동무들 여럿이 돌을 주워 뱀을 때려잡았다. 사내들이 돌로 뱀을 찍었다. 죽은 뱀은 풀빛이 아니면 나무빛을 띠었는데 터진 배에 뱀알이 있었다. 메추리알만한 크기로 하얗다. 뱃속에 알을 품은 뱀을 잡아 뱀이 우리 집 쌀독에 들어가 알을 놓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파랗고 커다란 쌀통을 보면 나 때문에 뱀이 나오는 줄 알고 무서웠다. 뱀이 벗어 놓은 허물도 길에서 자주 보았다. 뱀은 무늬가 얼룩이 지고 살결이 보드라우면서도 무섭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사진출처:네이버]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5] 조 강아지풀 닮은 서숙(조)은 잎이 옥수수 닮았다. 우리 집은 논이 얼마 없어 논둑마다 귀퉁이에 조금씩 심었다. 열다섯 살까지는 노란 좁쌀밥을 먹었다. 보리밥만 먹은 적도 있고 좁쌀에 쌀을 한 줌 섞는다. 찰진 좁쌀은 맛이 있던데 그때는 찰기가 없는 노란 좁쌀이라 내 입에는 거칠어 맛도 없고 먹기 싫었다. 거친 보리밥과 좁쌀을 오래 먹어 쌀밥 먹는 일이 꿈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앞서 우리 어머니는 한 해 동안 좁쌀만 먹고 살았단다. 부자들은 쌀밥을 먹고 어머니는 서숙 두 가마니를 찧어 좁쌀로 죽을 끓인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도 남 집에 여덟 해나 옮겨가며 일해 주며 살았기에 쌀밥 구경이라도 했지만, 어머니는 좁쌀로 버텼다. 이제는 밥에 섞어 몸에 좋다고 먹지만 우리는 먹을 쌀이 없어 누렇게 익으면 잘라서 털고 까불어서 밥을 짓는다. 그래도 좁쌀이 있어 우리 어머니가 한 해를 버티게 해 준 고마운 밥이다. 그래서일까, 고개 숙인 조를 보면 슬프다.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배곯지 않게 하고도 무엇이 섭섭할까. 가는 줄기에 그 많은 알곡을 맺어 어머니와 우리 몸을 돌봐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4] 산수유 우리 마을에는 산수유나무가 많다. 요즘은 사월이면 아랫마을에서 잔치한다. 우리 마을에서 아랫마을까지 내를 따라 논둑마다 산수유가 자란다. 중학교 가기 앞서는 우리 산수유나무가 없었다. 구천할매네와 순이네는 산수유가 많았다. 우리 어머니는 두 집 산수를 따면서 흘린 열매를 비스듬한 논둑에서 줍고 냇가에 내려가서 주웠다. 재 너머 효선마을에서 냇물을 막은 보가 있었다. 그 물로 큰물을 막아서 밑으로 흐르는 물이 적은 중보뜰에 들어가서 많이 주웠다. 불래마을 내도 둑을 막아 흐르는 물이 없어서 산수를 쉽게 주워냈다. 하루에 두 되 줍거나 날마다 조금씩 줍고 까고 나무를 찾아다니면서 남은 열매를 땄다. 그렇게 모아 온 산수유를 온 집안이 모여 깠다. 우리가 주운 산수유를 다 까면 어머니는 구천할매네 산수유를 한 말씩 갖고 와서 집에서 까고 우리는 순이네 집에 가서 산수유를 깠다. 큰방 작은방 마루마다 아이들이 밥상맡에 앉으면 순이 어머니는 반 되나 한 되씩 아이들이 달라는 만큼 우리 앞에 쏟아붓는다. 수북하게 작은 산이 된 산수유를 하나씩 집어서 씨앗을 뺐다. 앞니로 산수유 끝을 깨물어 터트리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4] 산수유 우리 마을에는 산수유나무가 많다. 요즘은 사월이면 아랫마을에서 잔치한다. 우리 마을에서 아랫마을까지 내를 따라 논둑마다 산수가 자랐다. 중학교 가기 앞서는 우리 산수유나무가 없었다. 구천할매네와 순이네는 산수유가 많았다. 우리 어머니는 두 집 산수를 따면서 흘린 열매를 비스듬한 논둑에서 줍고 냇가에 내려가서 주웠다. 재 너머 효선마을에서 냇물을 막은 보가 있었다. 그 물로 큰물을 막아서 밑으로 흐르는 물이 적은 중보뜰에 들어가서 많이 주웠다. 불래마을 내도 둑을 막아 흐르는 물이 없어서 산수를 쉽게 주워냈다. 하루에 두 되 줍거나 날마다 조금씩 줍고 까고 나무를 찾아다니면서 남은 열매를 땄다. 그렇게 모아 온 산수유를 온 집안이 모여 깠다. 우리가 주운 산수유를 다 까면 어머니는 구천할매네 산수유를 한 말씩 갖고 와서 집에서 깠다. 우리는 순이네 집에 가서 산수유를 깠다. 큰방 작은방 마루마다 아이들이 밥상맡에 앉으면 순이 어머니는 반 되나 한 되씩 아이들이 달라는 만큼 우리 앞에 쏟아붓는다. 수북하게 작은 산이 된 산수유를 하나씩 집어서 씨앗을 뺐다. 앞니로 산수유 끝을 깨물어 터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