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7] 참나무 겨울이 되면 비등수에 올랐다. 아버지는 마을 어른들과 비렁에 기대 햇볕을 쬐고, 우리는 좀 더 올라가서 좋은 참나무를 하나씩 맡았다. 나는 나무 밑 흙이 보드라운 자리를 골랐다. 솔잎을 따서 바닥을 쓸고 모래미를 그러모으고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작대기로 금을 긋는다. 돌멩이를 주워서 울타리를 쌓았다. 납작한 돌을 줍고 집에서 갖고 온 사금파리나 옹기 접시 깨진 조각을 돌에 놓고 살림놀이를 했다. 흙을 떠서 밥을 담고 떨어진 도토리를 몇 주워 한 접시 담고 풀잎을 뜯어 돌멩이로 찧고 솔잎도 돌에 찧어 접시에 담아 한가득 차린다. 냠냠 밥을 먹는 시늉을 했다. 좁은 길 따라 동무 집에 찾아가는 손님놀이도 했다. 우리 살림은 풀이랑 돌이랑 나뭇가지뿐이지만, 추운 겨울에 볕을 쬐면서 노는 일은 재밌다. 비등수는 온통 참나무이고 아궁이에 불을 때느라 다 다 베어서 산에 나무가 없었다. 나무가 어려서 도토리도 드물었다. 어머니는 도토리를 주워 방앗간에서 갈아 와 자루째로 물에 세 시간 담그고 검은 물을 뺀 뒤. 치대면서 찌꺼기를 거르고 웃물을 버리고 가라앉은 물을 끓여서 도토리묵을 했다. 낮에 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6] 구기자꽃 묵정밭에 풀이 자란 숲길을 내려오다 구기자꽃을 보았다. 작은나무에 열매도 몇 알 익어가는데 뒤늦게 보랏빛꽃이 피었다. 아홉이나 열 살 무렵에 장골에서 구기자를 땄다. 우리가 살던 집 뒤에 도랑이 있고 도랑 너머 감나무에 숙이네 소를 묶어 두던 풀밭이 있다. 숙이네 울타리이자 우리 집 울타리이다. 멧골에서 빗물이 흘러 지나가는 도랑둑에 우리 구기자가 한 그루 있었다. 윗집 숙이네는 골목에서 집까지 긴 마당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밭둑으로 구기자가 울타리로 길게 우거졌다. 구기자는 개나리처럼 가지를 뻗었다. 나무가 여리고 가늘었다. 덤불이 나지막하게 빵빵하게 퍼진다. 보드라운 줄기는 쉽게 번지지 않고 나무도 잘 크지 않아 언제나 우리 눈높이보다 높지 않았다. 구기자잎은 개나리잎보다는 보드랍고 고춧잎보다 빳빳하다. 나뭇가지가 가늘어 금낭화처럼 휘청이도록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푸른빛이 노랗게 익고 빨갛게 무르익어 빛깔이 곱다. 우리는 빨갛게 익은 것만 골라 땄다. 산수유는 씨가 있어 알이 탱탱한데 구기자는 물컹해서 작은 알을 따려고 힘을 주다가는 손힘에 툭 터진다. 물컹하게 튀어 얼굴과 옷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5] 도끼비바늘 고욤을 보려고 풀밭에 들어갔다. 사람 손길 닿던 밭이었는데 막상 들어가다 보니 풀이 허리까지 온다. 작은나무도 한 해 사이 허리만큼 자랐다. 풀을 발로 쭉 밀어 눕히면서 밖으로 그냥 나왔다. 바지에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었다. 바지 올이 풀린 끝단과 신발에 풀빛 바늘도 붙었다. 어린 날에 밭에 갔다가 풀밭을 지나서 집에 오면 그때에도 옷에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었다. 갈바람이 시원하게 불 무렵 털옷을 입고 실로 짠 바지를 입어서 도깨비바늘이 더 달라붙었다. 손마디 길이가 되는 바늘은 그나마 손에 잘 잡혀 떼기 쉬우나 작고 동그란 도깨비바늘을 떼면 올이 뭉친다. 도깨비바늘에 스치기만 해도 앞과 뒤 아래위에 달라붙어 떼고 뗐다. 마당에서 하나하나 떼는 일이 번거로워 그냥 들어가면 어머니한테 꾸중을 들었다. 내가 안 떼면 어머니가 떼야 했다. 도깨비바늘은 씨앗이 길쭉하고 뾰족한 가시이다. 가시로 몸에 달라붙어 숲을 나오려고 할까. 갈고리 가시로 척 붙으면 떨어지지 않아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들으라 할까. 걷지 못하는 씨앗은 움직이는 짐승과 사람한테 붙어 멀리 떠나고 싶었겠지. 바람이 불어도 스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4] 쇠똥구리 여름이면 산을 둘 넘고 간지밭 가는 갈림길에서 왼쪽 등성이를 올라 소를 먹였다. 잔디가 깔린 등성이다. 금서로 가는 갈림길인 오솔길에 소똥이 많았다. 마당에 소똥을 누면 삽으로 떠서 치우지만 숲길에는 그대로 있어 엉뚱한데 보다가 소똥을 밟기도 했다. 소는 길을 가다가도 꼬리를 들고 오줌을 누고 똥을 눈다. 물똥을 싸면 비켜섰다. 된똥은 땅바닥에 퍽 퍽소리 내며 진흙이 떨어지는 듯했다. 흙빛 똥이 까맣게 마르기 앞서 벌레가 모여든다.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마른흙이 펄펄 나는 길바닥에 쇠똥구리가 다닌다. 풍뎅이 같기도 하고 작은 사슴벌레처럼 까맣고 단단한 옷을 입었다. 소똥구리는 소똥을 굴린다. 똥을 울퉁불퉁하지도 않게 둥글게 만다. 작은 몸으로 구슬보다 곱이나 큰 똥을 영차 굴린다. 울퉁불퉁한 길로 쇠똥구리 둘이 힘을 모아 커다란 쇠똥알을 굴린다. 우리는 재미 삼아 소똥을 빼앗고 쇠똥구리를 작대기로 날리기도 하고 발로 밟았다. 쇠똥구리는 똥을 둥글게 빚어 알을 낳을 보금자리인데, 우리는 못되게 괴롭혔다. 쇠똥구리가 소똥을 치우는 줄도 모르고 짖궂게 굴었다. 이제 멧길도 숲이 우거지고 소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6] 삐라 어린 날에 소먹이러 가면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숲을 뒤지며 삐라를 찾는다. 나는 재 너머 숲에서 하나를 주웠다. 마을 언니 오빠는 몇 씩 줍던데 내 눈에는 삐라가 잘 안 보인다. 그때 숲은 요즘 숲과 달리 나무가 어렸다. 솔잎에 꽂히기도 하고 비에 젖었다가 마른 구겨진 종이는 풀밭에 드러났다. 내가 주운 삐라는 종이 돈 크기로 흑백 그림과 글씨가 적힌 듯도 하고 빨간빛이 적혔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소먹이러 갔다가 숲속에서 보물찾듯 삐라를 찾아 다녔다. 학교에 갖고 가면 선생님이 공책이나 연필을 주었다. 그렇지만 삐라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삐라를 보면 간첩이 가까이 사는 줄로 알고 떨었지만, 무엇 때문에 뿌리는지도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풍선에 넣어 멀리 왔거나 비행기로 뿌렸기에 산에 많았지 싶다. 그저 학교에서 주워 오면 상을 준다니깐 하나 더 받으려고 숲을 뒤지지만, 북쪽을 알리는 글이지 싶다. 바람은 나쁜 일도 씩씩히 한다. 돌개바람으로 바다를 건드리기도 하고 비를 몰아치기도 하더니 북쪽 풍선을 도와 우리 마을까지 보내고도 때론 숨죽이고 살랑이며 사람들한테 살갑게 구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3] 쥐똥꽃 쥐똥나무에 까치가 앉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직박구리가 시끄럽고 사납게 울어댄다. 작고 까만 열매가 송사리로 맺었는데 까치는 먹지 못하고 쫓겨갔다. 까만 열매가 쥐똥 닮아서 쥐똥나무 이름이 붙었지 싶은데, 열매가 많은 만큼 쥐도 많아 붙였을까. 어릴 적에 우리 집에 쥐가 많았다. 어머니가 집 둘레를 깨끗이 치워도 쥐는 어디 숨었다가 나오는지 담벼락이나 뜨락 따라 휙 지나가 부엌 모퉁이 가게로 사라졌다. 부엌 앞에 장독대가 있고 모퉁이 돌면 김치단지를 묻어두었다. 바로 옆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하루는 김치독을 묻은 가게를 지나 뒷집 담을 기어 올라갔다. 뒷집은 언덕이라 담이 높다. 우리 담장에 올라서도 내 키를 넘는 뒷집 언덕을 받치는 돌을 잡고 오른다. 빙 돌아서 가기 귀찮아서 담으로 다녔다. 다시 담을 타고 내려오다가 쥐를 보았다. 김칫독을 덮어둔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디로 쥐가 들어갔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생쥐를 보았다. 지푸라기에 다섯 마리가 모였다. 나는 생쥐 한 마리를 집어 손바닥에 놓고 보았다. 눈도 안 떴다. 갓 태어난 쥐는 살결도 곱고 보드라워 귀여운데 자라니까 검은 털이 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2] 고추잠자리 담쟁이에 첫물을 들여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잠자리 한 마리가 손에 앉았다. 한참을 꼼짝 않는다. 손을 가만히 멈추고 걸었다.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에 날아갔다. 어린 날 같으면 날아가기 앞서 얼른 잡았다. 여름이면 잠자리를 잡으러 쫓아다녔다. 마을을 벗어나 학교길 재를 넘으면 내리막 멧줄기가 아주 길었다. 학교 가는 길 반을 차지할 만큼 길다. 논밭 도랑길 따라 풀꽃나무가 우거진 멧자락에 잠자리떼가 많았다. 아지랑이가 햇살에 피어나고 꽁지가 빨간 고추잠자리가 가지에 내려앉으면 살금살금 다가가 두 손을 모으며 잡았다. 그물무늬 날개를 잡고 놀다가 한쪽 날개를 떼어 날렸다. 바닥에 꼬꾸라지듯 떨어진다. 주워서 이제는 빨간 꽁지를 뗐다. 이러고도 모자라 큰 눈이 차지한 머리도 뗐다. 어떤 날은 주머니가 달린 감을 따던 장대를 들고 와서 잠자리를 통째로 사로잡았다. 두 마리가 포개어 붙어 날거나 가만히 앉은 잠자리, 꽁지끼리 붙은 잠자리를 같이 잡았다. 놀이로 잠자리를 잡기도 하고 숙제를 풀려고 잡았다. 잠자리는 날개가 있으면서 달아나지 않고 붙잡힌다고 생각했다. 먹이를 잡아먹지도 않으면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1] 매미 서울 매미는 똑같은 소리를 한꺼번에 터트리고 기운을 쓴다. 누구 소리가 높은가 내기하며 우는 듯하다. 노래라기보다 시끄러운 소리로 들린다. 깊은숲 매미는 서로 다르게 고운 소리로 끊어지고 이어지고 쉬었다가 한결 세게 힘을 싣는다. 어릴 적에 듣던 소리이다. 마을에 큰나무는 거의 없지만 멧골 감나무에서 매미 울음이 들려온다. 뒤 안에 심은 감나무에 붙은 매미를 잡으려고 손가락을 모았다. 그러나 잡으려고 하면 날아갔다. 마당에 떨어졌다가 휙 날아가는 매미를 보기도 하고 죽어서 뒤집힌 매미만 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들일 하고 샛밥을 잡수러 올 적에 매미를 한 마리씩 잡아서 나를 주었다. 아버지는 동생하고 갖고 놀게 날개를 뜯어서 주었다. 어떤 날은 날개가 있어도 날아가지 못하는 매미가 있고 울지 못하는 매미도 있다. 아버지가 준 매미는 아이처럼 짧게 울었다. 나무에서 태어나 어두운 흙에서 몇 벌 허물을 벗으며 살던 애벌레가 다시 나무로 올라와 등을 가르고 날아가는 줄은 몰랐다. 어린 날에는 매미가 벗은 껍데기를 본 적이 없었다. 여름 한철 살아도 모습을 세판 바꾸고 땅에서 나무로 하늘로 넓은 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80] 밤 한가위에 마을 동무와 금성산에 올랐다. 풀을 헤치고 길도 아닌 비탈진 자갈을 밟고 오른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돌을 밟다가 돌이 굴러떨어져도 올랐다. 더 올라갔다가 내려올 적에는 썰매를 탈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길이 가팔라 중턱에서 멈추었다. 끝내 끝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내려오는 길에 밤을 서리했다. 밤나무 곁에 떨어진 밤을 까니 굵었다. 나무를 흔들어 밤송이를 떨어트렸다. 쩍 벌어진 송이를 두 발로 밟아 작대기로 벌려서 알을 꺼냈다. 빈손으로 왔다가 주머니 가득 넣거나 품에 넣었다. 떨어진 밤만 주웠더라면 떨리지 않았을 텐데, 나무에 달린 밤을 흔들어서 따고 보니 덜컥 무서웠다. 작은오빠 동무들이 아랫마을 길가에 있는 능금밭에 들어가 재미라며 능금을 따서 먹다가 밭임자한테 잡히자 경주로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능금값을 물어준 일이 있었다. 남이 심어 놓은 밤을 몰래 따서 밭임자가 알면 얼마나 속쓰리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 일이었다. 집까지 오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밤은 가시를 감싸서 누구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가로챘다. 밭임자는 멧짐승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79] 재 우리 집 아궁이는 네 군데가 있어 돌아가며 재를 퍼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보드라운 재가 쌓인다. 나는 재를 퍼내는 심부름이 싫었다. 가루가 날고 무거운 망태를 들고 높은 부엌문을 넘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재가 가득 차면 삽으로 퍼내야 아궁이에 넣은 나무가 솥바닥에 닿지 않는다. 새끼를 꼬아 만든 무거운 삼태기에 재를 퍼담아 거름에 쏟아붓는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는 재로 그릇을 씻은 적이 있다. 짚에 재를 담아 물을 부으면 노르스름한 물이 나왔다. 그 물로 빨래를 했다.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마당을 기어다니는데, 옷에 흙먼지가 붙고 더러웠다. 비누는 없고 잿물로 빨아도 한복 깃을 달 풀이 없어 이웃한테서 얻어 손질했다. 어머니가 갓 시집 왔을 때는 쌀도 없어 밥풀도 없었다. 아버지는 큰집살이 하면서 밥 먹을 적에 쌀밥을 골라내서 상 밑에 두었다가 들이나 밭에 갈 적에 어머니를 주면 어머니는 그 밥알로 할아버지 저고리 깃을 붙이고 바느질을 해서 입었다. 아버지는 임자 몰래 먹느라 눈치를 보았다. 어린 날에는 보리 짚단에 불을 지펴 밥을 했다. 산에 나무가 자라는 대로 땔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