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0] 막걸리 동생하고 나는 아버지가 드실 막걸리 심부름을 도맡았다.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를 들고 다녔다. 달빛이 밝은 날에는 길이 잘 보였다. 그런 날은 느긋하게 걷고 달이 안 뜨는 날에는 캄캄해서 개울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순이네 담벼락을 잡고 걷는다. 우리 집에서 전방(가게)까지 거리가 삼백 미터 남짓이다. 영이네 어머니는 국자로 단지에 담긴 술을 퍼서 내가 갖고 간 주전자에 담는다. 술을 휙 젓고 주전자에 붓는 소리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막걸리는 반 되 받는 날도 있고 한 되나 두 되도 받는다. 그런데 주전자를 건네받고 나면 손이 부끄럽다. 영이네 어머니가 돈 달라고 기다리는 눈빛이 돈 없다고 깔보는 듯해서 풀이 죽는다. ‘또 외상이가?’ 하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 싫었다. 내가 막걸리 심부름 가기 싫은 까닭이다. 아버지가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언제나 여덟 시쯤 된다. 시골이라 해도 빨리 떨어지는데 캄캄하도록 일하고 오신 아버지는 막걸리를 밥그릇에 부어 아주 맛있게 드신다. 입을 털고 ‘카’ 하고 길게 소리 내며 마셨다. 가끔 놀다가 밖에서 마시고 온 날이거나 속상해서 거나하면 어머니한테 막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4] 익모초 산에서 익모초를 마흔 해 만에 보았다. 멧산 층층 쌓인 자리를 밟으니 돌이 부서진 풀밭에 피었다. 어머니는 육모초라 했다. 익모초는 생김이 쑥하고 닮았다. 잎은 쑥보다 좁고 길쭉하다. 풀이 내 허리께에 오고 꽃대가 빳빳하고 한 뼘쯤 꽃이 피었다. 보랏빛이 도는 작은 꽃이다. 아버지가 가을에 풀을 베어 엮어 두었다가 말린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말린 익모초를 겨울에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끓여서 그 물로 감주를 삭히고 조청을 꼰다. 더 졸여서 동글동글 비벼 알로 먹는다. 어머니는 익모초로 비빈 구슬 맛이 향긋하다고 했다. 어머니한테 좋은 풀을 어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마을 어른한테서 배웠을 테지. 어머니도 많은 풀 가운데 꽃을 보고 찾아내는지 모른다. 묵혀둔 땅에 익모초가 많이 자랐다. 풀 같지만 곧고 꽃이 곱게 피어 눈에 잘 띈다. 목골 정이네 집 뒷간이 있는 높은 밭둑에 이 풀이 많았다. 그날 나는 우리 어머니 갖다 주려고 한 포기 뽑았다. 꽃대를 잡고 걸어가는데 내 허리춤까지 오고 굵고 크다. 우리가 먹는 쑥도 쓰고 한약도 쓰던데 몸에 좋은 풀은 모두가 쓸까. 익모초 달인 물을 많이 얻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3] 감자 마늘 캘 무렵이면 감자도 캔다. 우리 집은 노란감자하고 자주감자를 심었다. 땅미 재 너머 간지밭 금서 도빠골 진밧골에 논깃새에 돌아가며 심는다. 밭을 쪼개 고추 몇 줄 감자 몇 줄 심는데 감자는 다섯 고랑이나 세 고랑쯤 심었다. 어느 해는 진갓골에 감자를 많이 놓았다. 감자밭이 멀어서 캐는 일을 잘 거들지 못했다. 감자는 다섯 상자나 세 상자가 나왔다. 아버지가 지게 발에 감자를 담고 나른다. 마늘을 걸어 둔 가게 그늘에 감자를 말린다. 나는 큰오빠 다음으로 밭일을 하지 않고 감자를 삶아 들로 밭으로 갖다 주는 일을 맡았다. 마늘 가게 밑에 기어들어가 내가 까기 쉬운 감자만 골랐다. 껍질이 시들지 않은 까끌까끌한 감자가 껍질이 잘 벗겨진다. 떫은맛이 나는 자주감자도 깎는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샘에 걸터앉아 숟가락으로 쓱쓱 긁는다. 자주감자는 눈이 많아 눈을 후벼파도 잘 안 빠진다. 껍질도 잘 벗겨지지 않아 나중에는 자주감자만 남았다. 감자 깎는 칼이라곤 부엌칼과 숟가락이니 긁다가 내 손바닥을 긁기도 한다. 열두 살 어린 손으로 감자를 고르고 깎기는 벅찼지만 애어른 따지지 않고 일손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2] 수수 수수는 잎이 넓적하고 줄기가 워낙 커서 얼핏 옥수수와 닮았다. 꼭대기에 작은 알곡이 무르익으면서 빳빳이 세운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수꾸나무라 하고 수수가 다 익으면 자루에 넣거나 모기그물에 넣고 비비거나 방망이로 두들겼다. 작은 알곡이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살살 다스린다. 이렇게 떨어낸 작은 수수를 우리 어머니는 디딜방아에서 껍질을 벗겨낸다. 디딜방아에 알맹이를 벗기는 공을 끼우고 물을 조금 부어서 뒤적거리며 찧어서 껍질을 벗긴다. 껍질하고 알곡이 섞였기에 어머니는 손으로 퍼담아 키로 까불어 부슬부슬 말려서 붉고 찰진 수꾸떡을 구웠다. 아버지는 알곡을 털어낸 수숫대는 모아서 수수빗자루를 엮었다. 끝을 고르게 맞추고 끈이나 쇠끈으로 묶고 자르면서 비로 엮는다. 손잡이로 모은 수수는 한 줌에 잡히는 굵기로 군데군데 벌어지지 않게 쇠끈으로 동여 묶는다. 대는 통통하고 잘록한 손목 같았다. 아버지는 다 묶은 끝을 작두에 넣어 반듯하게 잘랐다. 빗자루에 알곡을 떨어낸 수수에 알록달록한 알곡 껍질이 남았다. 아버지는 못 쓰는 국그릇으로 달라붙은 껍데기를 쭉쭉 훑었다. 그릇이 얇아서 손에 잡기 좋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1] 꿀 우리 마을 멧골에는 아까시가 꽃을 피울 틈 없이 땔감으로 썼다. 멧골에는 나무보다 잔디가 많았다. 나무가 없으니 꽃이 없고 꽃이 없으니 꿀이 없다. 그렇지만 겨울에는 꿀을 먹는다. 가을에 나락을 거둬서 쌀이 넉넉했다. 겨울이 되면 쌀로 조청을 꼰다. 가마솥에 불을 때고 하루가 걸리는 일이다. 하나는 약초를 달여서 졸이면 꿀보다는 걸쭉하고 숟가락으로 떠서 들면 흐르는 약조청이다. 또 하나는 걸죽하고 달다. 조청을 하도 졸여서 숟가락을 넣으면 손잡이가 휘청거린다. 우리 집에는 벽장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먹을 밥살림을 두었다. 제사에 쓸 과일이나 떡을 두고 조청도 벽장에 두었다. 어린 나는 키가 작아 고개를 한참 쳐들어도 팔을 뻗어도 벽장 문에 손이 닿지 않았다. 베개를 놓고 밟고 이불을 밟고 올라서면 미끄러졌다. 동생을 엎드리게 하고 등을 밟고 올라섰다. 어머니가 숨겨 놓은 조청을 몰래 퍼먹는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티나지 않게 떠먹는다. 나는 약조청이 입에 써서 맛이 없었다. 빡빡한 조청만 먹었다. 어머니는 일이 바빠 조청을 얼마나 먹었는지 잘 알지는 못해도 다 아는 눈치였다. 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0] 부처손 멧길을 오르다 바위에 붙은 부처손을 본다. 이곳저곳 숲을 다녀도 눈에 안 띄던데 오늘 본다. 어릴 적에 본 부처손을 금성산 뒤쪽에서 보았다. 우리 밭이 그 골에 있었다. 덩굴진 풀밭에 옹달샘이 있고 물이 뿌옇다. 샘에서 넘쳐흘러 도랑길을 폴작 건너 칡덩굴을 헤치고 바위 밑에 선다. 나는 큰 바위를 자주 올려다보았다. 풀이 날 자리가 아닌데 푸른 부처손이 빽빽하게 바위를 덮는다. 가을이면 잎이 말라죽은 듯 오그라들었다가 이맘때면 푸르다. 오늘 보니 바위에 보드라이 흙이 있다. 나무뿌리를 타고 흙이 흘러 고였다. 고운 흙에 이끼와 자리를 잡고 가랑잎이 덮었다. 어린 날 내가 본 바위에는 가파르게 자리잡아 흙도 없는 바위에 붙었다. 나는 곧잘 따고 싶었지만 어린 내 손이 닿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따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지게에서 부처손을 꺼내 주었다. 나는 어디서 돌을 들고 와서 부처손을 얹어 수돗가에 두었다. 물을 돌에 뿌려 주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잎이 누렇게 말라 갔다. 나는 바위에 푸른 부처손이 붙어 자라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풀을 골라 반찬을 해먹는데 바위에 저렇게 많이 붙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49] 금은화 높은 바위틈에 금은화가 피었다. 덩굴이 돌담으로 뻗고 나무에도 엉키며 자랐는데 이제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바위틈에 자라네. 유월 볕에 금은화가 피면 꽃물을 빼먹으려고 꿀벌도 바빠지겠지. 나도 꽃에서 꿀을 따먹었다. 시골에서는 인동이라 했다. 장골 윗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따라 덩굴이 우거졌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꽃을 땄다. 노란꽃 하얀꽃이 같이 피고 빛깔이 곱고 맛이 달다. 꽃 하나를 따서 꽁지를 입에 넣고 쪽쪽 빨아먹고 또 따서 꿀물을 빼먹는다. 꿀은 내가 다 쪽쪽 빨고 집에 들고 왔다. 섬돌에 보자기를 펼치고 널어 햇볕에 말린다. 꽃이 마르면 담아서 벽에 걸어 둔다. 어머니는 닭을 고을 적에 넣고 단술(식혜)에도 넣는다. 꽃을 물에 끓여 우려낸 물에 단술을 삭히고 끓인다. 날꽃을 통에 담고 술을 부어 둔다. 아버지는 밥 먹을 적마다 한 모금씩 마신다. 어머니는 팔다리에 꽃이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을까. 약으로 쓰려면 꽃물을 먹으면 안 되는데 나는 꽃물을 쪽쪽 입에 물었다. 어머니는 좋은 줄 알고 했으니 단물이 있는 줄 알고 먹었으니 약이 되었지 싶다. 금은화는 금과 은처럼 보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48] 말밤 씨앗을 주웠다. 껍질만 다르고 빛깔하고 생김이 밤과 닮았다. 까맣고 두꺼운 껍질에서 씨앗이 나온다. 못에도 딱딱하고 가시가 돋은 껍질에 씨앗이 있었다. 어린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파 못에 기웃거린다. 오빠골에는 못이 셋이나 있다. 못이 크기대로 줄줄이 있다. 우리는 가운데 못에서 잘 논다. 길 바로 옆에 있어 물에는 부레옥잠 닮은 풀이 물낯에 퍼져 넓게 덮는다. 작대기를 하나 꺾어 풀을 끌어올리다가 뱀을 본다. 작대기를 물에 탕 치며 뱀을 쫓는다. 풀을 다시 당겨서 푸른 열매를 딴다. 깨물면 알이 덜 여물어서 물이 찍 뻗는다. 가뭄이 들거나 논물을 댄 뒤에는 못에 물이 준다. 물이 빠진 자리에는 진흙이 드러난다. 진흙이 말라 쩍쩍 갈라진 자리를 밟고 말밤(마름)을 캔다. 진흙에서 나오는 말밥은 물 낯에서 건진 풀빛하고 다른 흙빛이다. 아주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두 쪽으로 나고 세모지다. 깨물면 이가 부러질 듯 야물다. 하얀 가루가 나온다. 쌀가루 맛이 나는 가루가 쫀득쫀득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일하다가 호미로 말밤을 캐서 삶아 주었다. 못에서 나는 밤도 타박타박하다. 말밤 씨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09] 모깃불 여름이 되면 마당에서 잤다. 안방에서 뜨락을 밟고 두 계단 내려오면 마루를 붙여놓았다. 어머니가 밥을 할 적에 아버지는 마당에 불을 피운다. 볏단에 불을 지피고 풀을 덮었다. 연기가 많이 난다. 매캐한 연기가 마당을 휘돌고 바람에 떠밀려 다닌다. 우리는 마루에 앉아 저녁을 먹고 아버지 몽침이를 갖다 드리고 눕는다. 어머니는 거꾸로 눕고 동생하고 자려면 갈치잠을 잔다. 나한테 밀려나면 동생도 마당에서 잔다. 아버지하고 오빠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더 아무것도 깔지 않고 잘 덮지도 않고 잔다. 나도 멍석에 눕는다. 꺼끌꺼끌해도 넓은 멍석에 누우면 하늘에 눈길이 빼앗긴다. 눈썹달이 조금씩 살을 찌우며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눈썹달로 사라지는 달을 구경한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은 얼마나 반짝이는지 밤늦도록 별을 헤아리고 별을 찾는다. 올록볼록 카시오페아 국자꼴 북두칠성 북극성 작은곰자리 큰곰자리를 잘 찾았다. 아홉 살에서 열세 살 적에 본 밤하늘과 여름밤은 어린 날 하나뿐인 책이다. 별을 헤아리면서 잠이 든다. 새벽이슬을 맞으면 방으로 옮기는데 찬기운에 새벽에 깨서 혼자 방으로 건너가기가 싫었다. 네 시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8] 마늘 캐기 유월 보름 무렵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비를 안 맞히려고 마늘을 당겨서 캤다. 비 얘기만 뜨면 온 마을이 바쁘다. 수레를 타고 재 너머 마늘밭에 갔다. 모두 호미로 마늘을 하나씩 캤다. 소가 들어갈 길을 트면 아버지는 쟁기로 마늘을 깊이 갈았다. 마늘 심을 적처럼 줄지어 뒤로 물러 서다가 소가 지나가면 쓰러진 마늘을 줍는다. 마늘 뿌리에 진흙이 붙었으면 마늘을 마주치면서 흙을 털어낸 뒤 나란히 넌다. 마늘을 다 주우면 어머니 아버지는 마늘을 묶고 우리는 곁에서 쉰씩 헤아려 놓는다. 어머니가 하는 대로 따라서 짚으로 묶어 보지만 헐렁하다. 짚을 빙빙 돌려서 매듭짓는 일이 서툴다. 내가 묶은 마늘을 들면 마늘이 쑥쑥 빠진다. 어머니가 묶은 마늘을 우리는 두 손에 둘씩 거머쥐고 수레로 옮기면 아버지는 차곡차곡 높이 쌓는다. 마늘을 다 묶은 뒤 빈 논을 다니면서 떨어진 마늘을 줍는다. 우리 논은 이웃 마을에 있어 재를 넘는데 비렁길이라 울퉁불퉁하고 마른 먼지가 펄펄 났다. 오빠하고 아버지는 마늘을 집으로 나른다. 아버지가 가게에 올라가서 장대에 하나씩 건다. 밑에서 오빠가 하나씩 올려 주고 동생과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