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5] 하얀옷 네거리에서 문득 아는 언니가 생각났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입맛이 없어 이것저것 넣어 김밥을 말았단다. “주말 보냈고?” 묻길래, 그제 용암산에 올라, 누워서 하늘바라기하고 시를 썼다고 했다. “둘이 마음 잘 맞아가고 시인 길도 잘 가고 있다” 한다. 다 언니한테 좋은 기운 받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제, 착하게 살아서 좋은 사람이 오는 거다” 언니 말에 부끄럽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언니는 착하게 보았을까.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내게 언니는 언제나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 곧 노래책(시집)이 나오는데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될지, 내놓고 손가락질이나 먹지 않을지 걱정하면 힘을 보태준다.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으면 언니한테 전화한다. 이럴 적마다 길을 가르쳐 주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일은 나무란다. 언니 같고 엄마 같고 스승 같다. 씩씩하던 목소리가 어찌 힘이 없길래, 점심때 만나자고 했다. 서문시장에 옷을 찾으러 갈 일이 있다고 거기서 국수 먹자고 했다. 계단 밑에서 국수를 파는데 마침 쉬는날이다. 되돌아 나오는데 다른 집에서 국수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4] 하늘바라기 여름숲이다. 싱그럽다. 맑다. 나무도 푸르고 온통 풀빛이다. 흙을 움켜쥐어 본다. 풀이 뒤덮은 이 땅이 바로 별이라고 새롭게 느낀다. 어린 날 모깃불 피워 놓은 마당에 누워 놀던 캄캄한 하늘은 놀이터였다.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면 한 사람 숨결이 멎는다고 들어서 슬퍼하다가도 별자리 찾기 놀이는 자장노래가 아닌, 우리 눈을 더 초롱초롱 밝히는 가락이었다. 밤에는 별바라기를 하고, 낮에는 잔디밭에 누워 구름밭을 보았다. 칠월이 되니 구름 틈새로 보이는 하늘빛이 환하다. 숲에 드니 소리가 한껏 몰려온다. 매미도 질세라 목이 터지도록 한 가락 길게 읊는다. 이 울음이 떨림으로 오기까지 오직 사랑을 믿고 깨어났을 테지. 바람이 조용하다. 앉아서 쉬어도 조금 덥다. 앉고 싶어 멈춘 내게 곁님이 놀이를 하잖다. 아까시 줄기를 따서 건넨다. 곁님이 잡은 잎은 열셋, 내가 잡은 잎은 열일 곱인 줄 뒤늦게 알았다.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곁님이 자꾸 이긴다.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지 보 다음에 주먹을 내는지 머리를 굴린다. 져도 한꺼번에 잎을 날린다. 나도 이 사람이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 줄 알았고 보 다음에 주먹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 삶 12] 능소화 라면을 먹을까 하고 물을 채우는데, 곁님이 일꾼하고 밖에서 먹고 오란다. 그동안 밥때를 넘기고 집에 가서 먹는데 모처럼 밖에서 먹는다. 가랑비가 그치고 담벼락 따라 걷는 마음이 산뜻하고 가볍다. 김밥집 바람갈이(환풍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 벌써 능소화가 피었네. 바닥에는 꽃이 떨어졌네. 이 길로 차를 몰고 다녀서 못 보았구나.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에도 꽃을 피우다니. 꽃은 참 놀랍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꽃을 피우고 볕이 따가워도 웃으며 춤춘다. 가지 끝에 피어난 꽃은 바람이 살짝 건드려도 통통 튄다. 숨막힐 듯한데도 어쩌면 고이 옷을 입고 흐트러지는 빛도 없을까. 하나가 필 적보다 다섯여섯 송사리로 피어나니 더 곱다. 이렇게 곱고 예쁜 꽃이라면 하늘을 섬기는 마음을 품겠지. 요즘 나는 붉은 꽃이며 열매에 눈이 간다. 내 몸을 버티어 주는 가슴을 닮은 꽃을, 온몸을 돌고돌며 숨을 살리는 핏빛을 닮은 열매를 자주 들여다본다. 꽃도 과일도 물을 입히는, 씨앗이 빚어내는 빛으로 숨결을 빚는다. 내 몸에서 터지려는 붉은 기운을 가라 앉히기도 하고 먹거나 닿으면 싱그럽게 붉은 기운을 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1] 연꽃 몇 해 앞서 반야월 연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벼가 한창 익은 가을이었다. 이미 연꽃은 지고 뿌리를 캐는 밭이었다. 열매가 송송 박힌 연이 꽃만큼이나 소담스러웠다. 물이 말라 논바닥을 드러내기에, 연대를 꺾으러 논둑을 밟고 깊이 들어갔다. 진흙이 미끌미끌하다. 철퍽 미끄러졌다. 발이 푹푹 더 빠질 듯해서 그만 나왔다. 그런데 허리에 묶은 웃옷이 사라졌다.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린 옷을 찾으러 다시 가려다 그만두었다. 그때는 너무 늦게 가서 꽃을 못 보았고, 오늘은 이르게 가서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건너편 담벼락 언저리이면 꽃이 피었을까. 두 잎을 맞물고 돌돌 말아 나오는 잎도 있고 좀더 펼친 잎도 있다. 이렇게 잎이 다 펼치면 꽃이 올라올 테지. 커다란 잎을 깊고 오목하게 펼치기도 하고 납작하게 펼치기도 한다. 잎에 앉은 물방울이 구슬처럼 구른다. 잎이 축 처진 곳까지 가다가 바람에 잎이 흔들리자 어지럽게 구른다. 넓은 잎이 바람에 쓸려 막고, 뒤에 있는 큰 풀도 여러 잎을 구부려 바람을 막아 준다. 햇볕에도 사라지지 않던 물방울이 바람에 쉽게 떨군다. 두 손을 모은 듯 봉우리를 내민 꽃을 만난다. 바람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곁노래 곁말 24 작은님 언니가 있어 언제나 ‘작은아이’였습니다. ‘작은’이란 이름은 마흔 살이 넘든 여든 살이 지나든 매한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우리 집 둘째한테 ‘작은아이’란 이름을 씁니다. ‘작다·크다’는 좋거나 나쁘게 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저 앞뒤를 가리려고 붙인 이름입니다. ‘작은아이’라서 물러서거나 입을 다물어야 하는 자리가 수두룩했고, ‘작은아이’인 터라 “워낙 힘이 딸리고 안 될 텐데?” 하는 말을 숱하게 들었어요. 가만히 돌아보면 작기에 잘못을 너그러이 봐주기도 했지만, 작다고 너그러이 보는 눈이 달갑지 않았어요. “날 작은아이라 부르지 말고 내 이름을 부르라고욧!” 하고 으레 외쳤지만, 어른들은 호호호 웃으면서 “쟤가 참 철이 없네.” 하고 여겼습니다.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생각하다가 우리 집 두 아이를 놓고 어느 때부터인지 ‘큰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곁말’은 곁에 두면서 마음과 생각을 살찌우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말입니다. 낱말책에는 아직 없습니다. 글을 쓰는 숲노래가 지은 낱말입니다. 곁에 어떤 낱말을 놓으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빛낼 적에 즐거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곁말’ 이야기를 단출히 적어 봅니다. 숲노래 곁노래 곁말 23 먹깨비 저는 어릴 적에 무엇이든 참 못 먹는 아이였습니다. 스무 살까지 변변하게 안 먹으면서 살았는데, 싸움터(군대)에 끌려갈 적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김치뿐 아니라 못 먹는 밥이 잔뜩 있는데, 그곳(싸움터)에서는 주는 대로 안 먹으면 얻어터지잖아? 얻어터지면서 먹을 바엔 입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얼른 쑤셔넣고 끝내자.” 참말로 스물여섯 달 동안 맛이고 뭐고 안 가렸습니다. 밥판에 뭐가 있는지 안 쳐다보았습니다. 썩었는지 쉰내가 나는지 안 따졌어요. 배에서 다 삭여 주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에 새긴 말 때문인지 싸움터에서 밥 때문에 얻어맞거나 시달린 일이 없습니다. 싸움터에서 풀려난 뒤에라야 마음을 풀고서 몸한테 속삭였어요. “고마워. 몸이 이렇게 버티어 주어 살아남았구나. 앞으로는 몸이 거스르는 밥은 손사래칠게.” 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0] 소나기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감기 들지 않을 만큼 소낙비 실컷 맞고 싶다. 그렇지만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말은 실컷 들어서 이제는 그만 비껴가고 싶다. 시골로 가는 길에 소낙비가 내렸다. 곁님 입에서도 소낙비가 쏟아졌다. 둘 다 바빴다. 내가 먼저 집에 왔다. 문 앞에는 출판계약서가 왔다. 발간신청일이 며칠 남지 않아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몇 가지 적고 두 종이를 붙여서 가운데 도장을 찍고 스캔을 떴다. 서류에 이것저것을 적었다. 다시 훑어보니 몇 가지 빠졌다. 글을 발표한 날짜를 적어야 하는데, 가나다로 되어서 찾기가 번거롭다. 시골집으로 나설 때까지 다 해낼까, 걱정하며 서둘렀다. 차를 타고 가면서, “나 집 와서 얼마나 바빴는지 알아요? 날짜 찾아가며 그 많은 건수를 시간 안에 마치려고 혼”났다고 하니깐 “지금 살림살이가 어떤 줄 알고 큰돈 들여 책 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고 짜증 낸다. 이렇게 나를 조마조마하게 말할 때면 할 말이 없고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데 오 분 안 되어서 “내가 보이싱 피싱 당하듯이 대구에도 당한 사람 많다고 하네. 삼억 넘게 당한 사람도 있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9] 두부비지 곁님은 두부비지를 차리면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먹으면 구수한데 왜 안 먹느냐고 물으면 ‘그건 못 먹고 살 때나 먹었지, 난 안 먹어’ 하면서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이렇게 구수한 비지를 맛보면 안 먹는다는 말이 나올까. 약을 살살 올려도 먹을 생각을 않던 사람이 어쩐 일인지 비지찌개를 먹었다고 한다. 바나나가 점박이가 찍혀 곧 안 먹으면 물러 버릴 듯했다. 뒤에 빼두고 아줌마들이 오면 하나씩 주려고 했다. 마침 반찬가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국수를 산다. “반찬이 그리 많아도 먹을 게 없어 국수를 삶아 먹네요.”, “우리도 이렇게 나물이 나와도 하질 못해 없어서 못 먹네요.” 하는 푸념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이거 먹어 봐요. 먹어 보니 먹기 딱 좋아요. 나눠 드실래요?” “그럼요. 좋지요.” “몇 명이에요?” “다섯이요.” 한 송이는 떼 놓고 그릇에 담으려고 하니 훅 빼앗듯 갖고 간다. 바나나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아주 좋아했다. 반찬가게에는 곁님이 자주 간다. 내가 나물을 다듬고 싸느라 밥을 하지 못한다. 반찬거리가 있어도 몸이 힘들어 빈병을 모아 오는 할머니나 박스 할아버지를 준다. 반찬가게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8] 심부름 부엌종이가 똑 떨어졌다. 뒤쪽에 있나 싶어 가니 없다. 지하실에 있는데 가지러 가지 못한다. 아침 일꾼이 없어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이따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자니 그래서, 신문을 손바닥 크기로 잘랐다. 그릇에 올리고 버섯을 담는데. 마침 상자 할아버지가 왔다. 얼음 담는 가방을 하나 달라는데 지하실에 있다. 가지러 가지 못한다. “할배가 찾아 보실래요?” “어디 있는데?” “이쪽 계단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사무실 자리 쪽에 있어요” “열쇠는 어딧노?” “뒤쪽 못에 걸어 두었어요. 자물쇠는 문밖 상자에 올려두세요” 내려간 지 한참 지나서야 할아버지가 올라왔다. 찾은 가방이 둘 있어 하나 갖고 왔다. “가방이 뭐 이렇노?” 한다. “어디 함 봐요” 나도 처음 본다. 배낭처럼 생겼다. 지퍼를 닫고 등에 멜 수도 있고 손잡이를 들어도 되는 가방이네. 어디 놀러 간다는데 맥주라도 넣는가. 무거울 텐데 어깨에 메고 다니면 될 듯하다. “할배요, 부엌종이는요?” “또 내려갔다 올게. 근데 어떻게 생긴 거고?” “동그랗고 분홍 비닐에 싸였어요.” 지하실에 내려간 지 또 한참 지났다. 둘만 갖고 오라고 했는데…
[ 배달겨레소리 숲노래 글님 ] 오늘말’은 오늘 하루 생각해 보는 우리말 이야기입니다. 이 낱말 하나를 혀에 얹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으면서 생각을 새롭게 가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말빛 오늘말. 하늘지기 보는 대로 이름을 붙이고, 느끼는 대로 이름을 달아요. 한자를 아는 이들은 우리말 ‘기둥’을 ‘주상(柱狀)’으로 적더군요. 깎아지른 듯한 기둥이라면 우리말로 ‘깎은기둥’일 텐데, 한자말로는 ‘주상절리’입니다. 이웃나라 사람이 쓴 글 가운데 ‘빙점’이 있어 오래도록 그러려니 생각했으나, 아이들이 “이 책이름은 무슨 뜻이야?” 하고 묻는 말에, “그러게. 책이름을 우리말로 안 옮기고 일본말을 그냥 두었구나.” 하고 깨닫고는 ‘얼음눈’하고 ‘어는눈’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가만가만 보면 글이름뿐 아니라 풀꽃나무 이름도 잿빛집(아파트) 이름도 비슷비슷한 결이에요. 저마다 좋다고 여기거나 멋있다고 보는 쪽으로 기울어요. 수수하고 쉬운 말이 오히려 커다란 줄 모른달까요. 투박하면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이 빛나는 으뜸꽃 같은 말인 줄 몰라요. 하늘을 살피고 날씨를 읽으려 하기에 하늘지기요 날씨지기입니다. 별빛을 살피고 별흐름을 헤아리는 일을 하니 별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