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3] 가죽나무 가죽나무 잎은 봄인데도 빨갛다. 새싹이어도 붉다. 나는 붉은 가죽나무를 보면 만지기 무섭다. 옻나무와 닮아서 잘못 따면 옻을 옮는다. 아버지도 새싹을 딸 적에 그만 옻을 건드려 팔에 오돌토돌 오르기도 했다. 비 오는 어느 날 아버지가 가죽나무를 한 움큼 따왔다. 어머니는 물에 헹구고 총총 썰어서 고추장에 버무렸다. 아버지 밥상에 올라온 가죽나물은 향긋 했지만, 나는 이 냄새가 싫어서 비볐다. 아버지는 맛있다고 느긋하게 잘 드셨다. 어머니하고 나는 양푼이에 비볐다. 새싹이라지만 가죽나무 냄새는 내 입에 맞지 않아 잎을 골라내고 양념 맛에 먹었다. 우리 입에는 맛이 없는데 아버지는 맛있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어른은 아이와 입맛이 다른가. 봄이면 가죽나물을 아버지가 거의 혼자 드셨다. 여느 새싹은 푸르게 돋는데 붉은 가죽나무는 어느 모로 보면 곱구나 싶다. 새봄에 다들 옅푸르게 올라오지만 유난히 붉게, 또는 바알갛게 올라와서 눈에 잘 뜨이는 가죽나무는 온통 푸르기만 한 봄 들판에 알록달록 옷을 입혔는지 모른다. 처음엔 붉어도 따서 두면 푸른 빛으로 돌아가다가 검푸르게 시드는데. 보들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2] 도라지꽃 배움터에서 돌아오는 길이 멀어 달리기를 하고 길에 앉아 돌줍기를 하고 솔밭에 앉아 쉬고 또 달리면 어느 사이 오빠골 재 밑에 닿는다. 멧자락 따라 재 밑에 오면 느긋하게 놀았다. 아직 집이 멀어도 이 자리만 오면 집에 다 온 듯하다. 찔레가 있는 멧기슭 높은 밭둑에 도라지밭이 한 군데 있었다. 멧자락 밭둑이 높고 미끄럽다. 신발이 푹푹 빠져 흙이 들어가도 끙끙대며 풀을 잡고 밭에 오른다. 길가에서 본 보랏빛 도라지꽃이 가득했다. 우리는 밭에 오르면 한 골씩 맡아 꽃봉오리를 찾는다. 서로 터트리려고 이랑을 넘나드느라 도라지가 넘어지고 밭이 엉망이 된다. 도라지꽃은 풍선껌을 불어서 붙여놓은 듯 바람이 빵빵하게 찼다. 두 손으로 꼭 누르면 뽕뽕 소리를 내며 터진다. 어떤 봉오리는 픽 하고 바람이 실실 빠진다. 꽃봉오리를 터트리면 크기마다 바람이 빵빵한 세기에 따라 실로폰을 톡톡 두드리는 듯하다. 이쪽에 큰 봉오리 저쪽에 작은 봉오리 쪼끄마한 봉오리를 마구잡이로 터트렸다. 이랑을 옮기느라 춤추고 터트린다고 우리 몸짓은 춤춘다. 봉오리가 터진 도라지꽃은 하하 웃는 듯하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1] 수박 여름이면 마을에 수박 장사가 왔다. 경운기에 가득 싣고 알리면 마을 사람이 몰려와서 고른다. 손으로 톡톡 두들겨 통통 맑은소리가 나면 잘 익은 수박이고 퉁퉁 끊어지면 껍질이 두껍다. 그래도 속은 갈라 봐야 허벅허벅하거나 여물고 짙은지 알기에 아저씨가 세모로 칼집을 내어 속을 보여주었다. 찬물에 수박을 담가 두었다가 시원하다 싶을 적에 쟁반에 놓고 썬다. 수박 한 덩어리 자르면 가운데부터 골라 먹고 숟가락으로 껍질까지 긁어먹었다. 우리는 여름이면 수박이 먹고 싶어 작은고모네와 큰고모네에 갔다. 큰고모네는 살림이 넉넉했는데 구두쇠 이름이 붙어 다녔다. 수박은 마루에도 냉장고에도 있었다. 밭에서 수박을 팔고 남은 수박이 있다고 곤이하고 희야하고 밭으로 갔다. 비탈진 멧기슭 밭에 덩굴을 헤치고 수박을 땄다. 손날을 세워서 힘껏 수박을 내리쳐서 수박을 쪼갰다. 이랑에 쪼그리고 앉아 실컷 먹었다. 코가 수박에 닿고 턱에 닿아 물을 뚝뚝 흘리면서 크다 만 수박 일 곱 통을 그 자리에서 먹었다. 집에 와서도 냉장고에 든 수박을 꺼내 먹었다. 고모는 마루에 서서 많이 먹는다고 눈을 부라리며 성을 냈다. 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60] 타래붓꽃 어린 날에 본 타래붓꽃은 범부채 풀잎보다 좁고 길쭉하다. 빛깔이 푸르고 속대를 뽑으면 원추리 밑둥처럼 옅은 풀빛이다. 가느다란 풀잎 속대를 뽑고 속대 하나를 더 빼낸다. 속대를 빼면 풀잎 속이 비고 속대가 빠지면서 이파리 끝은 늘어진 옷처럼 구불구불하고 보드랍고 얇다. 아랫입술에 살짝 얹고 후 하고 바람을 불어 넣으면 붙은 풀 틈으로 바람이 들어가 곱게 풀피리 소리가 울린다. 풀피리 소리가 맑고 부는 일이 재밌어 강아지풀잎도 따다 불고 잎이 넓은 풀잎을 따다가 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고운 소리를 내는 풀피리는 타래붓꽃이었다. 타래붓꽃은 오빳골 오르막 길가에 한군데 뭉쳐 자랐다. 지름길 길섶에 무덤이 있어 무섭지만, 둘레에는 먹는 풀이 많고 놀이할 질긴 풀도 많고 노래를 배울 가락틀(악기) 같은 풀이 자라는 곳이다. 흙이 파여도 그곳에 자라는 풀은 늘 우리 눈길을 끌려고 애썼다. 겹겹이 있는 잎을 뽑았다. 입을 살짝 벌리고 바람을 불어넣으면 고운 소리로 풀피리가 되어 주었다. 소리가 얼마나 고운지 풀잎이 하늘거리며 부딪치며 바람에 떨리듯 울린다. 바람이 긴 풀대에 뽑히면서 소리를 울린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9] 삐비 오빳골 지름길 무덤 앞에서 삐비를 뽑아 먹었다. 우리는 ‘삐삐’라 했다. 겨울 바람이 봄바람으로 바뀔 무렵이면 잔디보다 조금 큰 풀에 자주빛 새싹이 가운데에 올라온다. 끝이 뾰족하게 돌돌 말린 새싹을 잡고 당기면 삐 소리가 나고 드르륵 덜컹 뿌드득 하며 촉촉한 풀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뽑힌다. 보드라운 새싹을 잡고 당기면 내 손이 작게 울린다. 삐삐를 막 뽑으면 촉촉하다. 돌돌 말린 새싹이 풀어지면 부피가 크다. 높이 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입에 넣으면 보드라이 혀에 감기고 씹을 틈 없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어릴 적에 말괄량이 삐삐 만화를 본 탓일까. 삐 하고 삐삐가 빠지는 소리로 붙여진 이름인지 모른다. 보드랍던 삐삐가 조금 더 자라면 하얗게 핀다. 우리는 하얗게 피어도 뽑아 먹었다. 핀 잎은 말라 털 같다. 마른 잎은 물이 많던 어린 삐삐하고 다르게 입에 달라붙어 목이 막혔다. 마른 삐삐도 한 입씩 따먹는다. 마른 삐삐는 침을 다 빨아들여 침을 모아 씹는다. 삐삐는 보랏빛 싹으로 올라올 적에 가장 달고 더 자라면 거칠고 씨앗을 맺어 먹지 않아 무덤가는 우리가 빠트린 삐삐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발걸음 11] 담금주 열두 살 적에 아버지가 안방 앞 처마 밑에 땅을 파고 병을 묻었다. 어머니가 간지밭에 고추 따러 가다가 길에서 뱀 한 마리를 만났다. 어머니는 손에 든 괭이로 꽁지를 누르고 끈으로 묶어서 비료 자루에 담아 왔다. 어머니는 독이 없는 뱀을 알고 잡았다. 병에 넣어 술을 붓고 뚜껑을 막은 다음 밭에 묻거나 비 안 맞는 자리에 묻는다는 마을 사람들 말을 듣고 아버지는 가까운 처마 밑에 묻었다. 뱀을 묻은 자리가 뜨락 앞이라 신발을 벗는 자리이다. 뜨락에 올라 댓돌을 밟고 문턱을 넘고 들어간다. 마루를 놓아둘 적에는 마루 밑에 뱀술이 있는 셈이다. 늘 누가 밟는 자리에 묻었다. 한참 지나 땅을 파고 병을 꺼냈다. 물이 빠져서 뱀이 하얗다. 장골 오두막에 살 적에 아버지가 자꾸 아팠다. 볕이 잘 드는 넓은 집으로 옮겨서 몸에 좋은 술을 먹는다. 쥐코밥상 맡에 앉아 한 모금씩 마신다. 아버지는 집 뒤쪽에서 지네를 잡아 실에 묶어서 오줌장군 오줌에 하룻밤을 담근다. 지네는 말리고 구워서 가루를 내어 술에 타서 마셨다. 아버지는 뭐라도 술에 타서 술술 마셨다. 뱀은 술을 무서워하고 지네는 우리 오줌에 꼼짝 못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7] 솜꽃 어릴 적에 우리 집은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여름에는 마루와 멍석으로 흩어 자지만 겨울이면 군불을 넣고 한곳에서 바닥에 이불도 깔지 않고 두꺼운 이불 하나를 덮었다. 중학생인 작은오빠, 나, 동생,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다섯이 덮었다. 이른 저녁에는 바닥이 따뜻하고 뜨겁지만, 새벽이 되면 구들이 식어서 몸을 움츠리며 서로 등 뒤에 딱 붙어서 갈치잠을 잔다. 누구 하나 몸을 들썩이면 찬바람이 들어왔다. 우리는 몸을 붙여 자서 이불하고 사람 기운으로 따뜻해서 바닥이 딱딱해도 잠을 잘 잤다. 그런데 우리 이불은 다섯 사람이 덮어서 아주 크고 무겁다. 이불 홑청을 베로 풀을 먹여서 다듬이질에 방망이질을 했다. 베도 무겁지만, 이불에 든 솜도 무겁다. 우리 집은 솜을 조금 심은 적이 있다. 탑리에서 솜씨를 받아서 심는 집도 있지만, 우리 어머니는 밍(명)타는 집에서 뺀 솜씨를 얻어서 밭에 심었다. 초롱처럼 생긴 꽃이 피었다가 꽃이 지면 솜 다래가 열린다. 솜 생길 적에 메아리 따서 먹었다. 바알간 다래는 풀내가 나도 먹을 만했다. 그렇지만 나는 잘 안 먹었다. 이 다래가 익어 다래꽃이 피었다. 찬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8] 뱀딸기 금성산에는 멧딸기가 아주 많다. 금서 가는 날이면 등성이에 올라가 딸기를 쏙쏙 빼먹었다. 줄기에 가시가 돋고 나무로 자랐다. 그러나 뱀딸기는 논둑 밭둑 못둑에 작은 풀밭에 한뼘 풀로 올라왔다. 가시도 없고 빛깔만 멧딸기하고 뱀딸기가 닮아 보이지만 꼴이 다르다. 뱀딸기를 한 입 베물면 안이 하얗고 허벅허벅하고 싱겁다. 멧딸기는 새콤하고 알알이 붙어 하나로 영글었다. 뱀딸기는 뱀이 먹고 사람이 먹지 못하는 딸기인 줄 알고 먹지 않았다. 빛깔이 고운데 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뱀딸기라 할까. 풀이 작아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이 먹는 줄 알까. 뱀한테 있는 독을 밍밍한 딸기로 씻을까. 나는 뱀을 보기만 해도 몸이 움찔하고 소름이 돋는다. 뱀이 나한테 뭘 하지 않는데도 무섭다. 뱀딸기는 내가 뱀 보고 놀란 몸에 돋은 소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이 추울 때 돋는 살결 같다고 이거 먹지 말라고 보여주나. 우리가 먹는 딸기는 줄기에 가시가 있어 뱀은 살결이 보드라워 먹고 싶어도 얼씬 못 하니 제 딸기라고 뱀도 먹으라고 남기나. 흔한 딸기를 먹고 독을 풀면 풀밭에 아이들을 신나게 뛰어놀게 모으는 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6] 노루귀꽃 언덕 집에 살던 일곱여덟 살 적에 노루를 처음 보았다. 아버지가 장골에서 일할 적에 비틀거리며 올찮은 노루 머리를 때려서 잡았다. 한데 가게에 장대에 거꾸로 매달아 두고 다음날 거죽을 벗겨 고아먹었지 싶다. 노루를 먹은 이튿날, 간지밭에 일하던 어미 소를 따라온 송아지가 풀밭에서 잘 뛰어놀다가 갑자기 죽었다. 이때 노루를 잡으면 재수 없다고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노루를 잡던 언덕집에서 아픈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는 밥을 먹지 못하는데 어디 아픈지 알지 못해 미역국을 겨우 삼켰다. 아버지는 속이 아프고 병원 가던 길에 똥이 마려워 누니 똥에 거품이 나오고 거품이 몸에서 빠져나오자 병원 가다가 병이 다 나았다. 큰오빠는 사타리에 돌을 끼워 돌치기 놀이하다가 돌에 맞아 도랑에 떨어져서 다쳤다. 집하고 우리하고 안 맞아 자꾸 탈이 났지 싶은데 노루를 잡아 송아지까지 죽었으니 재수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어쩌면 짝을 잃은 노루가 우리 송아지를 해코지했을까. 우리가 먹은 노루 귀를 닮았아서 노루귀꽃일까. 수줍은 듯한 꽃을 보니 노루도 참으로 얌전했을지 모른다. 재수 없다는 이름을 벗으려고 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글님 ] [숲하루 풀꽃나무 이야기 55] 느릅나무 숙이네 가는 길 가운데쯤에 언덕이 있고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곳을 지나갈 적이면 냅다 뛰었다. 나보다는 숙이가 많이 뛴다. 나는 언덕을 지나 우물가에 사는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집에 올 적에 뛰고 숙이는 장골 끝 집이라 언덕을 지나는 일이 더 많다. 어린 날 마을에 티브이가 한 대 있었다. 나무 상자에 채널을 돌리는 흑백티브이다. 연속극을 보려고 장골 목골 이골 사람이 몰려왔다. 나는 우리 골목만 틀면 바로 앞집이라 가장 가까웠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아이 어른이 함께 보았다. 집으로 올 무렵이면 어두워서 코앞이 집인 나도 무서운데 언덕을 지나는 숙이는 얼마나 무서울까. 그 언덕에서 개오지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흙을 뿌린다는 말이 온마을에 돌았다. 나는 개오지가 맷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길만 지나가면 여우 눈을 떠올리고 늑대 눈이 떠오르고 티브이에서 보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밤이면 무섭지만, 낮에는 그 나무 뒷산에서 소꿉을 하고 놀았다. 명자꽃이 울타리로 곱게 피었다. 명자꽃을 우리는 ‘앤지꽃’이라 했다. 아이들이 밤늦게 다니지 말라는 헛소문일 텐데 티브이에서 본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