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70] 말 말을 보다가 ‘아, 칼 안 쓰는 날을 여쭈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하고 생각한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힘껏 누르며 혼잣말을 한다. 의성 엄마가 파릇파릇한 말을 깨끗이 씻어서 썬다. 무를 먼저 썰어 살짝 바알갛게 물들 만큼만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리다가 말하고 섞는다. 엄마가 손으로 섞는데 침을 꼴딱 삼켰다. 손으로 한 입 집어 먹었다. 어린 날 먹던 맛이 난다. 말은 된장으로 무쳐야 제맛이지. 바로 먹고 싶은데 꾹 참는다. 그릇에 담아 달라고 했다. 단술도 조금 얻어 하회에 갔다. 시아버지도 잘 드시고 시어머니도 잘 드신다. 아버님은 “참 오랜만에 먹어 보네.”’ 한다. 이가 안 좋아서 몇 가닥씩 집어서 드신다. 나는 밥에 듬뿍 올렸다. 무치고 남은 된장을 얻어왔는데, 함께 비빈다. 된장이 많이 짜네. 그래도 말에 더 섞는다. 들고 오는 사이 무가 숨죽으니 물이 고였다. 말잎이 푹 죽어도 맛있다. 한 그릇을 비우고 한 숟가락 더 비벼 먹었다. 가음못을 지날 적에 보니 그 큰못이 얼었더라. 말은 깨끗한 물에만 산다던데, 얼음을 깨고 말을 쳤겠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말을 건져서 파니…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9] 잘 걷지 “엄마, 금요일 언제쯤 오나?” “10시쯤 나설게. 일찍으면 너 집 치울게.” “여수 가면 좀 걷는데 잘 걷제?” “그래 내 잘 걷는다. 그런데 일요일이 보름인데 마을잔치를 열면 못 가지 싶다.” “아, 보름이가?” “둘이가 밥 당번인데 나도 나이가 들어가, 오십만 원 받아 밥 당번 맡는데, 내가 가면 혼자 한다고 말 나잖아. 일요일에는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 어쩔지, 알아보고 말할게.” “그러면 못 가겠네. 다음에 가면 되니 잔치 하면 오지 마요.” “세 해씩이나 놀러 못 댕겼는데, 나도 가고 싶지.” 엄마랑 같이 못 가도 나는 여수 오동도에 갈 생각이다. 여수 바닷가에서 저녁에 해넘이를 보고서, 아침에 해돋이도 보고 싶다. 붉게 물들인 하늘하고 바닷물이 무척 보고 싶다. 몇 군데 돌고서 순천으로 넘어가 선암사와 송광사에 갈 생각이다. 이렇게 지나는 길에 낙안읍성과 순천만도 볼까 싶다. 청산도까지 가고 싶지만, 청산도는 꽃이 활짝 피어날 무렵으로 미룬다. 길그림을 펼쳐 놓는다. 엄마랑 같이 간다면 더 좋을 텐데, 아무튼 가고 싶은 곳을 더 적어 넣는다. 주소도 옆에 적는다. 이렇게 길그림을 펼치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8] 견디기 시골밭에서 흙을 담아 왔다. 동백에 조금 뿌리고 조그마한 텃밭에 살살 뿌렸다. 꽃이나 잎이 떨어지면 잘게 뜯어서 흙에 묻었다. 잎이 작고 여려서 이내 흙으로 돌아갔다. 작은 동백나무가 우리 집에 올 적에는 흙에도 나무에도 잎에도 이끼가 끼었다. 비닐집에서 살 적에는 촉촉해 보였는데, 우리 집에 오니 흙이 빨리 마른다. 물을 주어도 하룻밤 자고 나면 흙이 마른다. 손가락으로 살살 파 보고 긁어 보다가 물을 한 벌 준다. 물을 주다가 자꾸 마음이 쓰인다. 물을 주면 밖에 내놔야지 생각하다가 물을 주어서 얼면 또 어쩌나 걱정하고, 밑에 깔아 놓은 수건을 끌고 다니다가 한추위가 지나면 밖에 내어 튼튼하게 키우자 생각하다가, 아니지 밤새 추우면 어쩌나 싶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였다. 벌써 다섯여섯 송이가 꽃잎을 연다. 아무래도 따뜻해. 동백은 추운 날 꽃을 피울 만큼 추위를 견디지. 시골서 갖고 온 흙을 꽃삽에 담아 여리고 작은 풀이 넘어지지 않게 살살 뿌렸다. 받침대에 깔아 놓은 수건을 당겨서 밖에 두었다. 이제는 안에 들이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바람을 알맞게 견뎌야 꽃이 차츰차츰 필 테고 오래 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5] 동백 들이다 먼저 일 나가는 곁님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하회에 언제 갈려노. 의성도 들르고 오자.” “아, 난 주말에는 바람 쐬고 싶은데.” “참, 동백을 찾아보니 네 군데 있더라. 니 말대로 부산에 동백섬도 있대. 주말에 통영 장사도에 갈래?” 며칠 흐름이 깨지니 몸이 쑤신다. 머리도 한몫 거든다. 깡통이 머리에 든 듯하다. 설날에 읽으려고 꺼낸 책을 펼치니 안 읽힌다. 설날이면 보던 우리 소설이 생각났다. 꾸러미로 들인 책을 훑다가 다른 책을 펼친다. 어제는 제법 읽히더니, 책을 읽다가 동백이 언제쯤 꽃이 활짝 피려나 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이러다가 벌떡 일어난다. 동백을 안 보고는 못 견딜 듯하다. 요즘 몸이 자주 발끈하네. 해가 더 저물 텐데 꽃집으로 가자고 안달이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차를 몰았다. 밖은 추워도 차에서는 따뜻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좋다. 자리를 뜨끈뜨끈 데운다. 꽃집 앞에 선다. 꽃집은 날이 추우니 꼭꼭 닫아건다. 쉬는날 같지만 웅크릴 뿐이다. 한 집 한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동백이 한두 포기뿐이네. 어떤 집은 복숭아빛이 도는 서양동백이네. 이 아이는 삼색동백이네. 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4] 헌책으로 누리책집에서 내 시집을 뒤져 보았다. 새책 곁에 헌책이 나란히 뜬다. “이건 뭐지? 아, 벌써 헌책으로 나왔네! 이 일을 어째! 아직 시집을 낸 지 한 해조차 안 지났는데?” 갑자기 낯이 뜨겁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숨을 돌리고서 생각한다. 아니, 나도 헌책을 곧잘 사는데, 왜 내가 내 시집이 헌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낯이 뜨거워야 할까? 내가 쓴 시집이 헌책으로 나왔다면, 누가 틀림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그분이 샀든 누구한테서 받았든. 그렇지만, 지난해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샀다. 여태 다른 사람들 책을 새책으로도 헌책으로도 사면서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새책은 새책대로 헌책은 헌책대로 그저 읽어 왔다. 그런데 나는 왜 새해 첫머리부터 헌책 하나를 놓고서 무슨 큰일이 났다고 여기는가. 헌책을 사서 읽어 보면 알 텐데, 기쁘게 사서 곱게 건사했다가 내놓는 헌책이 있고, 재미없거나 값없다고 여겨 버리는 헌책이 있다. 잘 읽어 준 분 손길을 탄 헌책은 이름대로 ‘헌’ 책이어도 깨끗하고, 손빛이 곱게 묻어난다. 사랑을 못 받고 버림받아 ‘낡은’ 책은 갓 나온 뒤에 헌책으로 나왔어도 어쩐지 꾸깃꾸깃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7] 액시야 아침에 늦잠을 잤다. 시계를 보다가 쪽글을 본다. 눈도 떨어지지 않는다. “액시야 힘내라.” “그래. 고마워. 오늘 늦잠 잤네. 그제 제사 지내고 어제 몸살 했더니, 눈 뜨니 8시다. 아, 늦었뿟다.” “약 먹어라, 그냥 있지 말고. 우리 어제 영덕에 바다낚시 하러 왔다. 1박2일 하고 식당에 밥먹으러 왔다.” “우와 좋으네. 재밌게 놀고 맛난 거 먹고 겨울바다 잔뜩 보고 와.” “그래. 재밌다. 고기도 많이 잡았다.” ‘액시야’를 모처럼 들어 본다. ‘액시’는 경북 의성에서 시누이를 부르는 말이다. 내겐 언니인데 나는 말을 놓는다. 액시라고 부르는 언니는 나와 초등학교를 같이 나왔다. 다 어려울 적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어려웠다. 반 아이들이 도시락을 한 숟가락씩 담아 나누어 주었다. 이때는 내가 작기도 했지만, 언니는 또래보다 키도 크고 얼굴이 참 예뻤다.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 사촌 오빠와 사귀더니 오빠가 졸업하자 바로 살림을 차리고 애를 낳았다. 어떤 때는 언니라고 부르지만 그냥 말 놓는다. 그 곱던 얼굴이 참 많이 바뀌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이 언니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살림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6] 서울 가는 길 2022년 12월 첫머리에 《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을 내고서 처음으로 서울에 간다. 책수다를 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며칠 끙끙했다. 몸은 나보다 더 떨었는지 밥숟가락도 잘 들지 못했다. 더군다나 몸살이 나서 나들이에 마음을 쓰지 못했다. 머리가 다 풀어진 줄도 모르고 이틀 앞두고 머리손질을 했다. 딸한테 어떤 옷을 입고 갈까 묻느라 지쳤다. 얌전한 차림새를 하려고 하다가, 하루를 버티려면 등산화를 신어야겠구나 싶고, 옷하고 신이 안 맞는 듯하고, 가방을 메고 낯선 서울을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울 듯싶고, 두툼한 겉옷과 등산화를 신는다. 세 시간 미리 가서 마음 추스르면 한결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 말에 서울이 춥다는데 너무 일찍 가서 떨면 어쩌나 한 시간만 늦추자고 차표를 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대구서 서울 가는 표를 끊어야 하는데, 거꾸로 서울서 대구 오는 표를 살폈다. 마침 자리가 있어 표를 다시 끊었지만 까딱했으면 기차를 타고 들과 산에 쌓인 눈도 못 볼 뻔했다. 4호선을 타고 7호선을 갈아탄다. 갈아타는 곳을 헤매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여쭙고 다시 내려와 푸른띠를 따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3] 따스하다 문 앞에서 작은딸을 보내고 들어오는데 신발 벗던 아들이 ‘따뜻하네’ 하고 폴짝 뛰면서 방으로 간다. 작은딸이 짝을 맺고 첫 설을 우리 집에서 쇠고 갔다. 하룻밤 자고 갔지만 남겨놓은 따뜻함은 크다. 우리는 둘이 있다가 애들이 오면 잠자리가 뒤죽박죽이다. 나야 책마루(서재)가 있어서 누가 오든 안 오든 아무렇지 않다만, 곁님이 늘 비켜준다. 작은딸이 짝을 맺은 한 달이 조금 넘는데 새사람을 마루에 재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우리 딸도 시집에 가면 잠자는 일을 걱정하는데, 사위도 우리 집에 오면 마찬가지이다. 아직 화장실 쓰기가 버거울 테니 큰방을 내준다. 큰방을 쓰던 큰딸은 아들 방으로, 아들하고 곁님은 마루로 하기로 했다. 어서 이불을 바꾸고 방을 치우려고 널어놓은 큰딸 짐을 닫는데 한바탕 날선 말이 오갔다. 큰딸이 불쑥 투덜거렸다. 곁님은 작은딸하고 사위가 왜 큰방을 써야 하는지 못마땅해 했다. 이 꼴을 보자, 갑자기 내 안에서 확 터졌다. 지난 섭섭한 일들이 한꺼번에 스쳤다. 곁님이 애들 앞에서 나를 깔보는 듯한 말은 안 하면 좋겠는데,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언뜻 나왔다. 큰딸은 짐을 옮기면서 “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2] 칼 안 쓰는 날 “야야, 칼 쓸 일 있으면 오늘 다 장만하거라.” “왜요, 아버님?” “칼 안 쓰는 날이다.” “사과하고 배는 어떻게 해요?” “그건 작은 칼로 도려내고, 큰 칼은 쓰지 마래이.” 달걀을 노른자 흰자를 따로 부쳐서 채썰었다. 무와 고기도 미리 손질해서 그릇에 담았으니 두부만 숟가락으로 으깬다. 다진고기에 참기름을 부어 볶다가 두부를 넣고 으깬다. 김 두 장을 비벼서 가루로 뿌렸다. 사과하고 배를 깎는다. 열 시쯤 되면 써도 된다고 했는데, 작은 칼이니 괜찮겠지. 시아버지는 절에서 받은 달력을 걸어 두고 본다. 절집 달력에 짐승이 띠이름대로 나오던데, 어떤 짐승을 보고 칼을 쓰지 말라는 걸까. 작은 칼로 깎았지만 크든 작든 칼인데 찜찜하다. 시어머니는 명절날이나 제사에 걸리면 미리 사과나 배도 깎아 놓고 그날은 칼을 멀리했단다. 미리 챙기는 일도 안 쓰는 일도 마음이 쓰일 텐데. 아직도 달력을 보고 몸소 따른다. 칼은 쇠고 쇠는 돌에서 나오고 돌은 흙에서 나왔을 터. 이래저래 따지면 걸림돌이 얼마나 많을까. 날카로운 칼은 어떤 뜻으로 삼가려나. 칼은 갈고 갈아서 무엇이든 자르고 끊는다. 잘 쓰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61] 말랑감 상주 푸른누리를 지난달에 다녀왔다. 상주 시내에서 한참 먼 멧골에 깊이 깃든 그곳은 숲집 같았다. 그날 그곳에서 얻어온 말랑감이 남았다. 빛깔이 곱고 말랑한 감을 먼저 골라 먹다 보니 까맣고 흉이 난 감만 남았다. 어찌할까 하다가 까치밥으로 삼기로 한다. 물을 큰 그릇에 옮긴 날 말랑감을 하나 놓았다. 아침에 문을 열어 빼꼼히 보니 쪼아먹은 구멍이 났다. 물을 더 붓고 감을 둘 또 놓았다. 까치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두리번거린다. “이 물을 누가 놓았지? 감은 어디서 떨어졌지?” 하는 듯했다. 까치는 물을 먹을 적에도 모이를 먹을 적에도 소리를 낸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면 조용히 몰래 먹어야 할 듯한데, 오히려 소리를 낸다. 요즘 내 귀에 이 소리가 말로 들린다. 살피는 몸짓이 말 같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어디 있어요?” 같은 소리가 들리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가리개 곁에 숨어서 본다. 큰 까치가 오니 어린 까치가 날아갔다. 큰 까치는 넓은 물독에 들어갔다. 꼬리가 잠기지 않는다. 어느새 날아가고 어린 까치가 왔다. 물을 먹고는 감껍질을 한 입 물고 날아간다. 누굴 줄까. 저 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