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2] 강가 걷기 큰딸이 집에 왔다. 해가 떨어지면 시냇가에서 뛰자고 한다. 한가위 지나면 달리기 대회에 나간다나. 요즘 뛰기에 푹 빠졌다. “엄마는 뛰지 못해” “그럼 나 뛰는 거 구경해” “그럴까” 창밖을 보니 구름이 발갛다.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건널목을 건너고 철길 건널목을 지나 골목으로 빠져나오니 냇가를 잇는 다리가 나왔다. 다리를 건너 강으로 내려갔다. 남쪽으로 가다가 돌아보니 구름이 노을을 입었다. 금빛이었다가 붉게 바뀐다. 더 붉어질까. 딸한테 말해서 길을 바꾸자고 했다. 북쪽으로 시내를 따라간다. 비둘기가 길바닥에 몇 마리 가만히 있다. 다리 밑으로 가까이 가니 포르르 날아오른다. 비둘기가 앉은 곳은 다리 바로 밑판이다. 가만가만 전봇대에 참새가 앉듯이 나란히 앉았다. 끝이 안 보였다. 아, 비둘기집이었구나. 비가 오면 어디서 쉴까. 잠은 어디서 잘까 무척 궁금했는데, 다리 밑판에서 쉬는구나. 더울 때는 시원하고 비바람을 그으면 따뜻하겠다. 내가 있어 물 먹기 좋고 햇살이 들면 풀밭에 나와 쬐기 좋고 차에 부딪힐 걱정 없어 마음이 놓인다. 따라나오길 잘했구나. 이렇게 많은 비둘기가 쉬기에는 다리 밑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1] 목소리 돌개바람이 지나간 다음날 엄마한테 전화했다. “비 피해는 …….” “그래, 괴안타. 아랫마을에 일하러 왔다. 뭐라 카노… 왜 그러노?” “갑자기 말이 안 나와 …….” “잠 안 자고 너무 공부해서 그렇다” 말이 나오지 않아서 더듬거리는데 엄마는 너무 애쓴다고 하네. 옆에 누가 있는 듯하다. 어쩐 일인지 다른 사람 들으라는 딸 자랑하는 말이네. 삼십 초 넘기지도 못하고 끊는다. 목에 가는 털이 서로 부딪치듯 작게 떨리며 간질간질했다. 나오지 않았다.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살가죽을 당기지만 목에서 떨리며 소리를 막는다. 일어나 물을 마시지 않아서 더 그런가. 밤새 입을 꼭 다물고 자서 그런가. 일할 때는 말짱하다가 집에 와서 입을 다물어서 그런지 곁님이 전화하면 기침만 나고 말이 안 나온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이러다 목소리를 잃는가. 혼자서 ‘아아아아아’ 소리를 내지만 간질간질한 떨림이 사라질 때까지는 내지르지 못했다. 마침 집에 온 큰딸한테 말했더니, 큰딸이 유전자검사를 했단다.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는데 발병률이 높은 암검사를 다섯 가지 해준대서 갑상선암을 받았다. 발병율이 99%라나. 어쩐다나. 가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30] 우체국 며칠 우체국에 들렸다. 일터 가는 길에 두 군데가 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은 어쩐지 딱딱하다. 책꾸러미 하나를 저울에 올리고 나머지 무게가 같다고 말해도 ‘올려 주세요’한다. 나는 ‘똑같아요’ 말했다. 팔을 뻗기 귀찮은가, 말하기가 더 번거로운가. 나도 모르게 발끈거린다. 그러다가 보내는 글자루에 적힌 이름을 생각하며 꾹 참는다. 세 판쯤 이런 일을 되풀이하자 입이 거칠어질 듯해서 일터 가까운 우체국을 들른다. 예전에는 우체국 일꾼이 스스로 저울에 올렸는데, 이제는 우표값을 내는 손님이 올리라 하면서 너무 딱딱하다. 일터 곁 우체국은 군말이 없이 전화번호나 주소를 쉽게 살펴준다. 저울에 하나를 올리고 같다고 하면, 슥 쳐다보고서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체국은 똑같은 우체국일 텐데, 왜 이곳하고 저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확 다를까.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책꾸러미가 있다. 처음 우체국에 가져가서 책을 부칠 적에는 글자루(봉투)가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얌전히 담아서 다루었다. 돌아온 꾸러미는 택배나 등기가 아닌 일반 우편요금으로 보냈는데, 두 이레만에 돌아온 책꾸러미는 너덜너덜 걸레가 되었다. 풀을 붙인 자리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9] 맑음 ‘맑음’은 내가 나한테 붙인 첫 이름이다. 영어로 하면 닉네임일 테고, 우리말로 하면 글이름이다. 2020년부터는 내가 나한테 ‘숲하루’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맑음’이라는 글이름을 그대로 써도 되지만, 어쩐지 새롭게 둘레를 다시 바라보면서 새길을 가야겠다고 느껴서, 글이름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 처음 ‘맑음’이란 이름을 나한테 붙일 적에는 문득 마음으로 스치는 낱말을 붙잡으려고 했다. ‘맑음’이란 이름을 쓰면 스스로 맑게 살고 싶다는 꿈대로 가리라 여겼고, 맑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 스스로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이웃님 글을 읽는데, 글이 참 곱더라. 비단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쓴 글을 다 뒤지며 읽은 적이 있다. 그렇지만 말은 날씨를 닮았더라. 봄이기도 하다가 바다에서 거세게 밀려오는 비바람이 떠올랐다. 어느 이웃님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싹싹하게 글을 쓰고 허튼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짧게 쓴 글을 보면 섬뜩하다. 속을 꿰뚫으려고 하는지, 어쩐지 피바람이 불고 피비린내가 퍼지는 듯했다. 그분 글은 속이 메스꺼웠다. 내가 글을 잘 안다고는 보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8] 되새김질 문닫는 소리에 잠이 깼다. 한가위가 코밑이라 곁님은 시골로 떠났다. 친척 몇이 모여 무덤에 풀을 벤다. 그가 없으니깐 가게에 나가 봐야 한다. 시계를 맞추어도 일어나지 못하는데 문득 잠이 깼다. 혼자서는 어디 가지도 갈 곳도 마땅찮다는 생각이 일고, 같이 다닐 동무 하나 없다는 생각이 겹치자 잠이 확 깬다. 이대로 고히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사로잡혀 벌떡 일어났다. 새끼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여서 설거지를 미뤄 두었다. 그릇을 씻고 거름그물을 수세미로 씻어내고 물을 끓여 뜨거운 물을 부었다. 마른걸레를 적셔 아들이 쓰던 방을 닦고 마루도 닦고 부엌을 닦는다. 곁님이 날마다 청소기를 돌려서 바닥을 닦은 걸레가 깨끗하다. 마루하고 방을 닦을 적에는 내 마음도 닦는다. 내 나름대로 바쁘게 사느라 둘레가 들어오지 않았다. 불쑥 혼자인 듯하니 아득한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에 떨어진 듯해 그저 막막하다. 지나간 일들도 잘 떠오르지 않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데도 반쯤 보고서야 본 줄 알고, 머리가 확 풀어지면 시렁에 꽂아두고 읽지 못한 책을 읽어야지 싶은데, 좀처럼 안 된다. 글은 나아지지 않고, 쓰는 글은 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7] 과일바구니 택배가 왔다. 상자가 묵직하다. 부피가 이만큼 되는데 뭘까, 칭칭 감아 잘 뜯기지 않는다. 궁금하니깐 마음이 더 부산스럽다. 칼로 돌아가며 뜯으니 얇고 까끌한 분홍보자기가 나온다. 보자기가 곱다. 풀어서 뚜껑을 여니 과일이다. 누가 보냈지? 상자에 적힌 이름을 보니 작은딸 짝꿍(남자친구)이다. 한가위에 못 오겠구나 하고 어림한다. 상자에는 메론, 배, 사과, 태주, 자몽, 레드향, 보랏빛망고, 노란망고, 용과, 키위가 들었다. 키위 하나는 납작하게 터졌다. ‘내가 일하는 가게에 다 있는 과일인데 애먼 돈 쓰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지만, 그래도 들뜬다. “덕이가 보냈네. 우리 가게에 과일 많은데 한가위라고 보내는가?” “오옹” “먹기 아깝다야” “웅웅 한가위이라고 보냈다고 하네. 망고 맛있겠따” “아직 야무니 니가 와서 먹어. 키위 하나는 터졌어” “조아!!!! 헐지짱” “배는 가운데 조금 썩은 거 보냈네. 장사꾼이 그렇지 뭐” “아무래도 택배여서 그런가 보다” “엄청 좋으네. 첨 받아 보아” “그래 가게 과일이랑은 또 다르니까. 맨날 안 좋은 거만 먹자나” “그러게 싱싱한 거 먹어 보네” “웅웅”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6] 감자눈 나물 손질을 마쳤다. 밥때가 훌쩍 지났다. 배가 고프니 손이 느리다. 어서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뒷자리를 추스르다가 까만 뚜껑을 연다. 감자가 싹이 났다. 넷씩 담은 감자를 뜯는다. 과일 깎는 칼끝을 거꾸로 잡는다. 노랗게 올라온 눈을 파낸다. 손으로 밀면 부러지지만 배꼽에 싹이 남아서 이내 삐죽 올라온다. 후벼 파고 다시 넷씩 담아 싼다. 작은 상자에 담아 놓은 감자에도 싹이 났다. 신문을 덮어 놓은 감자를 봉희 씨가 골라온다. 나는 신문에 부어서 눈을 따고, 봉희 씨는 상자에 부어서 눈을 딴다. 감자 하나에 눈이 많다. 움푹한 자리마다 눈이다. 햇감자가 나온 지 이제 두어 달쯤 될까. 감자에 벌써 싹이 났다. 둘은 감자싹을 파면서 수다를 떤다. 봉희 씨가 어제는 두 시쯤에 집에 갔다. 제사를 지냈다. 동서는 부침만 거들다가 방에 가서 눕고 거의 혼자 한 듯했다. 제주도에서 일하는 곁님 전화에 ‘이제는 당신 아버지 제사 못 지내겠다. 너무 힘들다’고 했단다. 시어머니하고 동서하고 시동생이 다 있는 자리에서 말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음이 났다. 넉살이 참 좋구나. 첫얼굴처럼 맑고 시원시원하다는 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5] 이력서 가게에서 저녁에 일하는 학생이 그만둔다. 이학기 수업이 모두 낮으로 잡혔다. 새로 일할 사람이 다녀갔다. 나는 새사람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곁님이 이력서를 보냈다. 빽빽하게 적혔다. 어떤 사람일지, 일을 오래 할지, 일을 잘할지 훑어본다. 여느 이력서와 다르다. 꼼꼼하게 적었다. 학력을 보니 여상을 나왔고 마흔 넘어 대학공부를 하고 사이버대에서도 배웠네. 자격증은 간호조무사 사회복지사 아동심리상담사 부모교육상담사 전산회계를 땄다. 열세 해를 은행에서 일하고 열여섯 해를 쉬었다가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막창집에서 주말 곁일을 했다. 여기까지야 누구나 이야기를 하지만 집안 이야기는 좀처럼 잘 안 하더라. 그렇지만 이분은 스스럼없이 적었다. 이분 곁님도 은행에서 지점장으로 마쳤고 아이들이 다니는 일터도 적었다. 나를 돌아본다. 나는 열한 해 앞서만 해도 이력서를 자주 냈고, 우리 집안 이야기는 감쪽같이 숨겼다. 말도 아꼈다. 내가 하는 일을 말하면 월급이 드러날까 싶어 부끄러웠다. 일터를 말하면 얼마나 배웠는지도 드러나고 돈벌이가 드러난다. 우리 집 살림을 다 드러내는 일이 아주 싫었다. 누구네처럼 달삯이 많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4] 문 닫기 가게에 일 나가기 싫은 날이 가끔 있다. 한두 가지를 손질하려고 가자니, 씻고 차려입기가 귀찮다. 모자를 눌러 쓰고 간다. 어제 받아들인 조선 단배추 세 단과 조선 열무 넉 단을 담아 계산대에 주고 오늘은 물건만 싼다. 파프리카가 올랐네. 값만 붙여 자리에 올린다. 잘라 놓은 양배추가 아무래도 적어 보여 반쪽 잘라 놓은 양배추를 또 잘랐다. 바나나는 비닐을 빼서 다 꺼낸 뒤 칼로 반을 자르고 그릇에 담아 싸면, 곁에서 저울에 올려 값종이를 뽑아서 나란히 갖다 놓는다. 토마토는 다섯씩 싸면 좋겠는데, 서로 부딪히면 무를 듯해서 넷을 어긋 담는다. 참다래도 넷씩 담는다. 당근을 둘씩 싸고 옆에서 저울에 올려 값종이를 뽑아서 붙이고, 마늘을 한 자루 뜯어 일곱 그릇에 똑같이 저울에 달아서 담았다. 이래저래 싸기만 했더니 빨리 끝난다. 열두 시가 안 된다. 혼자 집에 가자니 어쩐지 눈치가 보인다. 과자가 빈 자리는 새 통을 뜯어 채우고 당긴다. ㄹ과자는 뒤쪽이 텅텅 비었다. ㄹ과자 회사에서 밀어넣기를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많이 넣지 못하게 한다. 사탕도 푹 줄었다. 겹겹 쌓인 사탕을 반 내려 빈자리에 채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3] 개구리 소년 그제 와룡산엘 다녀왔는데 이 숲에서 사라진 아이들 이야기가 신문에 나왔다. 안동에도 와룡산이 있다.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밤꽃이 한창 필 적에 그 밑으로 풀밭을 헤치며 올랐다. 오솔길에 바위가 하얗고 돌부리가 많다. 커다란 바위에 앉다가 까투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때도 와룡산이라는 이름이 무서웠고 여기 대구 와룡산도 그랬지만, 지난 봄날에 벚꽃이 아름답게 핀 숲을 본 뒤로 가볍게 올라야지 했다. 회화나무에 꽃이 푸릇푸릇 피고 길바닥은 잎이 쌓여 눈처럼 쌓였다. 대나무 숲을 지나니 건너 넓은 길로 사람들이 올라간다. 쓰러진 나무로 쌓은 계단이 이어진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곧고 계단으로 놓은 길이 조금 따분했다. 소나무하고 아까시나무가 웃자라 숲에 해가 덜 드는지 나무에 이끼가 낀다. 비가 오기도 하지만 하루 내린 비로 이끼가 끼지는 않겠지. 바닥에는 겨울에 떨군 가랑잎이 깔리고 사람이 다니는 길가로 어린나무를 심었다. 아직 내 팔뚝보다 가는 편백나무이다. 소나무와 아까시나무 자리에 심었다. 한 나무는 속이 다 비었는데도 아까시잎이 싱싱하고 꼬투리도 맺었다.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버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