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2] 큰애 생일 큰애가 팔월에 집에 온다고 한다. “엄마하고 한 이틀 바람쐬러 가자.” “어디로?” “남쪽이나 서쪽 섬으로.” “엄마 운전 솜씨 못 믿겠는걸.” “탈나면 둘이 겪어 가면서 정도 내고 좋잖아.” “왜 가려고 해?” “니캉 좀 더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러제.” “이미 좁혀졌는데 뭘.” “며칠 뒤 니 생일이네. 미리 축하해.” “엄마는 한 번도 축하 안 해줬어.” “무슨 소리야, 네 생일날 바빠서 그렇지 늦게라도 꼭 했는걸. 봐, 지난해도 했잖아.” “근이 제대 일자는 기억하면서 내가 생일이라고 말해서 한 말이잖아. 손꼽아 제대 일자는 기억하면서 딸래미 생일은 모르고.” 아무래도 같이 가기 싫은갑다. 다른 사람은 잘 챙기지 않아도 제 생일은 챙겨 주기를 바라는구나. 뭔가 모르지만 꼬였구나. 반갑게 말하다가 끊을 적에는 말이 무겁다. 어린애도 아니고 말하기도 조심스럽다. 이 아이가 네 살 무렵이었을까. 둘째가 태어나고 동생을 귀여워했는데, 그때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둘째를 감싸안은 사진마다 토라진 낯빛이 붉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사진으로 보니 큰아이 마음을 이제야 읽는다. 셋째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1 - 시집 보따리 시집을 한 보따리 받았다. 그끄저께 모임이 있었다. 인천까지 멀기도 하고 곁님이 가지 말라고 했다. 아는 시인한테 내 몫으로 좀 받아 달라고 여쭈었다. 이분은 내가 어느시인협회에 들어오도록 다리도 놓아 주었다. 아는 시인 없는 나로서는 이분 발자취가 부럽다. 늘 넘치도록 온갖 시집을 그냥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부럽다. 너무 많이 받아서 귀찮다고 얘기하는데, 나도 귀찮을 만큼 누가 보내주는 시집을 받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얼결에 한 보따리를 받는다. 시집 보따리를 하나씩 펼쳐 보는데, 시인이 참 많구나. 이렇게나 시인이 많은데, 내가 쓰는 시가 끼어들 틈이 있으려나. 내가 내놓는 시집을 알아볼 눈이 있을까. 시집에 적힌 전화번호를 내 손전화로 하나씩 담아 놓는다. 얼굴조차 모르지만, 알음알이로 만나는 시인이 이렇게 늘어나는구나. 앞으로는 손을 꼽을 수 없을 수도 없도록 시인 이름을 알 수 있겠구나. 나는 어떤 글이나 시를 쓸 수 있을까. 나는 풀꽃나무를 보는 하루를, 멧골을 오르내리는 걸음을, 곁님하고 가게를 돌보는 살림을, 세 아이를 낳아서 키운 삶을 그려도 될까. 시집 보따리를 펴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20] 시집 광고 ㄱ에서 곧 잡지가 나오는데 이때에 광고를 넣으면 어떠냐고 묻는다. 잡지를 내는 곳에 몸을 담그면 광고를 그냥 실어 주는 줄 알았는데, 돈을 내면 싣는단다. 내 이름을 넣은 책을 처음으로 내놓기에, 조금이라도 더 알리면 좋겠다고는 생각하는데, 광고비까지 더 써야 하는 줄 몰랐다. 그래서 둘레에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물어본다. 내가 쓴 시를 처음 실어 준 곳에 시를 몇 자락 보내면서 그곳은 “시집 광고를 어떻게 하나요?” 하고 여쭌다. 이곳에서는 따로 돈을 받지 않고서 내 시집을 알리는 글을 실어 주겠단다. 고맙다. 얼마나 기쁘던지, 목소리가 높아지고 활짝 웃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 웃음소리 때문에 그냥 실어 준다고 말한다. 조금 우습지만, 웃는 기운이 이토록 힘이 세구나.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이지만, 광고비를 안 쓰고 여러 사람이 보는 잡지에 올려서 뿌듯하다. 내 책을 하나 내놓으면서 여러 사람을 조금씩 알아간다. 꾸벅꾸벅 절을 하는 자리마다 조금씩 돈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구나. 그래도 뭔가 텅 빈 듯하다. 책을 왜 그저 책으로 마주하지 않고, 사이에 돈을 놓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9] 잘 썼나? 이레 뒤에 책이 나온다. 내가 쓴 시를 모았다. 자랑하고 싶다. 잘했다고 해줄 만한 피붙이가 있을까 궁금하다. 둘레에 쪽글을 남기니 하나같이 “한 권 사면 될까?” 하고 묻는다. 우리 집에서도, 아이들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다. 남이라 할 만한 먼 사람들은 “축하한다”거나 “잘 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우리 집에서는 바라기 어려운 듯싶다. 그래도 이 무덤덤한 사람들한테 빙긋빙긋 웃으면서 알린다. 스스로 슬쩍 자랑질까지 해본다. 작은오빠는 “응, 살게. 축하한다. 대박 났으면 좋겠다” 한다. “그래, 작은오빠야는 몇 권 사주나?” 하고 물었더니 “둘레에 책 좋아하는 이가 없어서 줄 데가 없는데?” 한다. 엄마한테도 “엄마는 책 많이 팔아 줘야 한대이, 엄마한테는 책 한 권이 아주 비싸대이.” 했더니, “야야, 내가 요즘 일을 나가지 않아 돈이 없다”고 짜는 소리를 한다. “엄마,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대이.” 했더니 “그라마 한 권 사서 친구한테 줄까?” 하고 묻는다. “잘 썼나?” “잘 못 썼는데, 부끄럽데이. 내가 내 글을 스스로 잘 썼다고 어째 말하나. 그저 책을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잘 읽어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8] 숨통 신호등이 바뀌고 브레이크를 꽉 밟았는데 차가 부르르 떤다. 누가 앞에서 끌어당기는 듯 그대로 박차고 달릴 듯이 덜컹 멈칫 또 덜컹 멈칫하며 몸도 까딱까딱한다. 판을 보니 그림 하나에 노란불이 깜빡인다. 기어를 뒤로 당겨 N에 두지만 멈추지 않고 앞으로 밀어 P에 놓고 발을 떼어 보지만 덜컹덜컹한다. 뒷거울로 보니 마침 차가 안 온다. 바로 옆으로 옮겨 모퉁이 타이어 가게로 갔다. 바퀴가 말썽 나지 않았지만 아저씨는 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움을 바라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앞서 손사래 친다. 이튿날 고치는 곳에 맡기자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깜빡이던 그림인데, 내렸다 타니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에 먼저 나간 곁님이 지하실에서 부른다. 시동 버튼을 짧게 눌러 판에 나오는 그림을 보고 앞뚜껑을 연다. 긴 핀을 빼서 물과 기름을 찍어 보지만 왜 그런지 까닭을 모른다. 하루 일손을 빨리 마치고 고치러 갔다. 손잡이 밑에 기계를 꽂아 차를 훑는다. ‘스로틀 바디’에 때가 끼었단다. ‘스로틀 바디’가 뭔지 물으니 엔진으로 들어가는 바람을 맞추는 길인데 먼지 때문에 길이 좁아서 바람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단다. 사람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7] 오누이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올 적마다 그림자처럼 그 사람한테 어떤 말이 붙어 온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가씨 학생 어린아이를 따라오는 말, 목소리와 몸짓과 옷차림새에 따라 늙은 말 젊은 말 맑은 말이 가게에 들어온다. 오늘 따라 이 사람들 나이에 어울리는 물건을 찾아 구석구석 다니고 뒤따라온 말이 우리 물건에 숨결을 넣고 시렁을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사람과 물건과 말이 함께 숨을 쉬는 듯하다. 가게에 있는 큰 냉장고는 문이 없다. 여름에 찬바람을 돌리지 않지 않아도 차다. 소름이 돋고 추워서 팔짱을 끼고 손바닥으로 살을 비비는데, 어느새 두 아이가 내 앞에서 얌전하게 두 손을 배꼽에 얹고 절을 한다. 누나는 잠옷 치마를 입었다. 풀밭에 기린이 있고 커다란 풍선이 하늘을 날고 파란 구름이 담긴 가방을 들었다. 살결이 뽀얗고 하얀 웃옷과 방긋 웃는 얼굴이 깃든 복숭아빛 치마가 곱다. 동생 손을 꼬옥 잡았다. 두 아이한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초콜릿을 골라 가방에 담고 아이스크림을 둘 고르고 과자도 고른다. 누나가 내게 쫓아와서 ‘안성탕면이 어디에 있어요?’ 묻는다. ‘맨 끝 골목 끝에 있어. 한자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6] 까기 내가 없는 사이 유선이가 취나물을 다듬었단다. “큰일 했네” 한마디 해주었더니 “명희가 아가씨인데도 왜 나물을 다듬는지 알겠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물을 다듬으면 귀찮게 여길지 모르지만 뜻밖에 재밌다. 마른 잎을 고른다. 살짝 무른 잎도 고른다. 먹을 수 있는 싱싱한 잎끼리 따로 모아 한 자루 담아 놓으면 뿌듯하다. 나물은 묵어서 다듬을수록 손길이 더 가는데 돈은 덜 받는다. 나물이 제 임자를 찾아가며 제 몫을 다한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팔아도 얼마 안 되지만 누가 사가면 즐겁다. 죽음 끝에 살아난 나물이기에 다듬는 손길은 숨결을 다스린다. 비닐에 담아 놓은 청경채가 물방울이 차서 끝이 무르고 누렇게 떴다. 유선이는 자루를 뜯어 청경채를 한곳에 모으고, 나는 잎을 다듬고 그릇에 담는다. 네 그릇이 나와서 칸에 둘 수 있다. 이제 로메인이란 나물을 다듬는다. 자루마다 하나씩 물렀다. 로메인이 비를 맞았는지 뚝뚝 꺾인다. 처음 왔을 적부터 이러더니 까맣게 무른다. 유선이는 자루를 뜯어 한곳에 모으고 나는 골라서 새 자루에 넣는다. 둘을 다듬고 나니 개운하다. 시골서 갖고 온 옥수수를 까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3] 옻골마을 뒷산 풀이 돋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을 넘어 옻골마을에 들어선다. 길가 밭에는 살구가 노랗게 익어 가고 자두가 발갛게 익어 간다. 가뭄이어서 그런가, 자두알이 작다. 마을로 들지 않고 숲길로 든다. 숲에 참나무가 많다. 나무 틈에 살구가 노랗게 익었다. 지팡이로 가지를 당겨 살구를 딴다. 작지만 맛이 달다. 몇 알 더 딴다. 살구씨는 나무 쪽으로 던졌다. 조금 걸어서 들어가니 싸리꽃이 곱게 피었다. 덩굴풀은 나무와 한몸으로 붙었다. 군데군데 잎이 돋았다. 이제 다리를 쉬려고 자리를 잡아 앉는다. 땅을 뒤덮은 향나무를 본다. 위로 뻗지 못하고 땅을 덮으며 뻗었네. 멧숲을 오르면 이 멧숲에는 어떤 나무가 많을까 두리번거린다. 숲길은 뿌리를 드러낸다. 비껴가면서 바닥을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든다. 가지에 목수건이 걸렸다. 누가 떨어트렸구나. 날이 더워서 손에 쥐고 가다가 놓쳤구나. 나무에 빨간 끈이 묶였다. 멧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끈을 묶어 놓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쓰러진 나무를 묶었다. 가지가 찢어진 곳에 네 군데를 끈으로 묶고 나무를 괴고 넘어지지 않게 했다. 너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할 듯한데도 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5] 하얀옷 네거리에서 문득 아는 언니가 생각났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목소리에 힘이 없다. 입맛이 없어 이것저것 넣어 김밥을 말았단다. “주말 보냈고?” 묻길래, 그제 용암산에 올라, 누워서 하늘바라기하고 시를 썼다고 했다. “둘이 마음 잘 맞아가고 시인 길도 잘 가고 있다” 한다. 다 언니한테 좋은 기운 받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제, 착하게 살아서 좋은 사람이 오는 거다” 언니 말에 부끄럽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언니는 착하게 보았을까.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내게 언니는 언제나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 곧 노래책(시집)이 나오는데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될지, 내놓고 손가락질이나 먹지 않을지 걱정하면 힘을 보태준다.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으면 언니한테 전화한다. 이럴 적마다 길을 가르쳐 주고 내가 잘못 생각하는 일은 나무란다. 언니 같고 엄마 같고 스승 같다. 씩씩하던 목소리가 어찌 힘이 없길래, 점심때 만나자고 했다. 서문시장에 옷을 찾으러 갈 일이 있다고 거기서 국수 먹자고 했다. 계단 밑에서 국수를 파는데 마침 쉬는날이다. 되돌아 나오는데 다른 집에서 국수를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작은삶 14] 하늘바라기 여름숲이다. 싱그럽다. 맑다. 나무도 푸르고 온통 풀빛이다. 흙을 움켜쥐어 본다. 풀이 뒤덮은 이 땅이 바로 별이라고 새롭게 느낀다. 어린 날 모깃불 피워 놓은 마당에 누워 놀던 캄캄한 하늘은 놀이터였다.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면 한 사람 숨결이 멎는다고 들어서 슬퍼하다가도 별자리 찾기 놀이는 자장노래가 아닌, 우리 눈을 더 초롱초롱 밝히는 가락이었다. 밤에는 별바라기를 하고, 낮에는 잔디밭에 누워 구름밭을 보았다. 칠월이 되니 구름 틈새로 보이는 하늘빛이 환하다. 숲에 드니 소리가 한껏 몰려온다. 매미도 질세라 목이 터지도록 한 가락 길게 읊는다. 이 울음이 떨림으로 오기까지 오직 사랑을 믿고 깨어났을 테지. 바람이 조용하다. 앉아서 쉬어도 조금 덥다. 앉고 싶어 멈춘 내게 곁님이 놀이를 하잖다. 아까시 줄기를 따서 건넨다. 곁님이 잡은 잎은 열셋, 내가 잡은 잎은 열일 곱인 줄 뒤늦게 알았다.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곁님이 자꾸 이긴다.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지 보 다음에 주먹을 내는지 머리를 굴린다. 져도 한꺼번에 잎을 날린다. 나도 이 사람이 주먹 다음에 가위를 내는 줄 알았고 보 다음에 주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