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2. 낯씻기 날마다 머리 수그리고 일하느라 사람 얼굴을 제대로 못 본다. 어쩌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도 누군지도 몰라 모른 척하고 내 일을 한다. 누가 곁에 와서 아는 척 건네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살갑게 맞는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들어오면 하얀 입가리개만 눈에 들어온다. 날이 추우니 차림새가 어둡고 입을 가려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도무지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 가리개를 해서 눈빛이 여느 때보다 부드럽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더 차갑게 보이는 사람이 더 예쁘게도 보인다. 사람들 얼굴을 제대로 본 지가 아득하다. 그나마 나는 사람들 눈빛을 보고 목소리도 듣지만, 첫째는 집에 갇혔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집에서 일하는 날이 차츰 늘어난다. 이제는 숨이 막히는지 갑갑해서 못 견딘다. 좁은 곳에 갇혀 지내면서 때때로 전화하고 말을 받아 주면 수다가 길어지고 아예 끊을 생각을 않는다. 끊자고 하면 도리어 놀아 달라고 혀짧은 말을 한다. 일을 집에서 하고 셈틀로 보며 일을 주고받고 글뭉치는 사람을 불러서 보낸다. 이참에 얼굴에 난 점을 뺄까 묻는다. 돌림앓이가 한 해를 넘고 집에서 일하니 입을 가리지 않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1. 콩 콩을 아무렇게나 흙에 묻었다. 하룻밤 지나고 나니 싹이 돋았다. 머리에 까만 껍질을 뒤집어쓰고 쑥쑥 오르고 줄기가 가느다랗게 웃자라 넝쿨로 자랐다. 혼잣힘으로 서지 못해 나무젓가락을 꽂아 기대 준다. 몇 밤 자고 나니 더 높이 자라 젓가락을 훌쩍 넘는다. 꽃집에서 얻은 꼬챙이를 둘 꽂았다. 해가 잘 드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도 줄기가 시들시들 자란다. 잎이 타듯이 말라 한 잎 두 잎 떨어지길래 저절로 폭삭 내려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날 물을 주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잎이 떨어진 줄기에 콩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콩을 심은 지 넉 달이 접어든다. 지난해 시월에 냉장고에 있던 검은 콩 몇 알을 작은 나무 곁에 심었다. 물을 좋아하는 나무 곁이라 물을 먹는 흙을 눈여겨보았다. 한 마디마다 떡잎을 벌리며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알이 여물지 않은 것이 더 많지만 두 알씩 든 꼬투리 둘은 단단하게 여물었다. 내 손으로 처음 키워낸 콩꼬투리를 만졌다. 콩나물로 기르는 일하고 사뭇 다르다. 우리 집 숟가락통을 처음 살 적에는 시루로 쓰려고 했다. 구멍이 숭숭 나고 둥근 도자기가 둘 붙었다. 메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10. 운전기사 시동 단추를 켜자 빨간 그림(!)이 뜬다. 집으로 오는 길모퉁이에 있는 바퀴집 마당에 차를 세운다. 아저씨가 바퀴를 빼서 바람을 넣고 물속에 담그고 꾹 누른다. 뽀글뽀글한 물방울이 안 일어나면 바람이 안 센다고 보여준다. 다른 바퀴도 봐야 하는데 바람 넣는 긴 줄 기계가 얼었다. 슬쩍 본 앞바퀴가 무척 닳았다. 곁님은 바퀴를 바꾼 지 몇 해 안 된다고 잘못 몬 버릇이라고 거든다. 차를 몬 지가 스물일곱 해가 넘는다. 갓 면허를 받고 곁님 차를 몰았다. 일터가 집에서 가까운 곁님은 자전거를 타고 나는 곁님 차를 몰거나 가끔 버스를 탄다. 1999해 12월에 빨갛고 작은 차를 샀다. 아들을 밸 적에 몰던 차를 열일곱 해를 몰았다. 기어가 옴짝달싹하지 않아 차를 버렸다. 일터에서 쓰는 차도 있고 곁님 차도 있어 나는 차를 사지 않으려고 했다. 곁님은 안 그래도 된다고 하지만 일터를 잘 꾸려가라고 어머님이 보태주셨는데, 차를 사면 시골 어른이 못마땅히 여길 듯했다. 곁님이 시골에 갈 적에 이러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미는 차를 몰 만하다. 그 차 오래 탔으니 바꿀 때도 됐다. 너도 조금 보태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9.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날인데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기 어렵다. 아이들이 훌쩍 커서 나가고, 믿는 종교도 없어,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듯하다. 그저 쉴 수 있는 날로만 여기지 싶다. 기분을 내려고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노래를 올렸는데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대꾸가 없고 딴말만 한다. 내가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우면 교회에 갔다. 며칠 도장 찍는 재미로 가고 선물 받는 재미로 갔다. 그런데 엄마는 교회 나가는 사람을 예수쟁이라 부르고 무엇이 못마땅한지 교회를 가지 못하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여름 수련회도 가지 못하게 해서 겨우 갔다. 그날부터 교회는 가고 싶어도 참다가, 고2 때 동무 따라 몇 번 가고, 마흔이 되어서는 종교를 하나 갖고 싶었다. 목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았다. 나라밖으로 나들이하는 길로 여겼다. 스스로 아는 언니한테 교회에 좀 데리고 가라고 졸라서 몇 번 나갔다. 다섯 번쯤 나갔을 때 곁님이 눈치를 채고, 교회 나가려면 통장 다 꺼내놓고 아주 가란다. 언니하고 다짐한 세 번을 더 채우고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종교가 없지만, 시집에서는 교회 다니는 일을 아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8. 숨 스물넷 봄에 함께한 뒤 시골에서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옷을 차려입고 아버님께 절을 드린다. 어머님이 차리신 밥을 먹고 일을 다녔다. 세 어른하고 지내면서 집안에서 하는 일을 차근차근 배웠다. 한 달 남짓 함께살다가 따로 살림을 차렸다. 곁님이 어버이 집을 끔찍이 챙기느라 쉬는 날이면 찾아가 하룻밤 묵는다. 함께살고 여섯 달이 지날 무렵 큰할머니 제삿날에 우리가 쓰던 방에서 첫째 아이를 품었다. 아기가 조금만 늦게 오길 바랐다. 일터에서는 짝을 맺으면 어떤 구실을 달아 내쫓던 때인데, 아기가 있으면 더 눈총을 받는다. 이 무렵 높은 자리 어느 분이 주식하고 증지로 장난질을 하고 밑사람들은 그분을 몰아내려고 자리가 어수선했다. 우리 살림도 넉넉하지 않았다. 곁방 하나 딸린 집이고 어설픈 부엌에서 사글세로 살고, 곁님이 예전에 몰고 다니던 자동차 값을 나눠서 갚느라 둘이 벌어도 살림이 빠듯해 아기를 새로 맞아들일 겨를이 없었다. 옛사람이 보내주신 빛으로 여기면서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 딸이면 지우고 아들이면 낳기로 했다. 앞서 아이를 없앤 일이 있어 또 지우면 다시는 아이를 못 밸 듯해 두렵고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7. 잠 늦잠을 잤다. 알림소리를 잠결에 두 차례 들었는데 끄고 다시 잤다. 깨어나니 여덟 시쯤 되었다. 눈이 뻑뻑하여 거울을 보니 퉁퉁 부었다. 나이가 들수록 눈꺼풀이 밉게 바뀐다. 잠을 푹 자면 붓고 덜자면 깊은 주름이 드러나고 눈도 뒤통수로 당겨 움푹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네 시나 다섯 시만 되면 깨는 몸이라는데, 나는 여섯 시간이나 일곱 시간은 자야만 하루를 버틴다. 자다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한두 시간 걸리고 곁님이 뿜는 큰 숨소리하고 입을 쩝쩝 다시는 소리에 쉽게 깬다. 잠귀가 밝다. 셋째가 태어나고 열 살까지 같이 잤다. 열 해를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자느라 잠이 모자랐다. 아들은 아무리 꾸지람해도 못 고쳤다. 잠들었는가 싶어 슬그머니 나오면 바로 안다. 다시 곁에 가서 재운다. 이런 일이 잦아 큰방으로 건너와도 내 귀는 아들 방에 두고 아들은 내 발끝에 둔다, 둘 다 잠귀가 밝다. 갓난아기 때는 아기라서 그렇다지만 일곱 살이 넘어서도 같이 자고 열 살까지 이어졌다. 내 가슴팍에 헐렁하게 안기거나 맨손이 제 몸에 닿아야 포근하게 잤다. 나는 말할 때 뜸을 안 들고 바로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6. 이불 말린 이불을 꺼내려고 뚜껑을 연다. 뺨에 뜨거운 기운이 부딪치며 한 김 빠진다. 따뜻한 이불을 꺼내 가슴에 꼭 안으니 새물내가 풍긴다. 이불이 뺨에 닿으니 부드럽고 뽀송뽀송하다. 큰방하고 작은방을 다니며 침대에 올린다. 얇은 이불을 깔고 덮을 이불을 가지런히 놓는다. 밖에 걸어 둘 틈도 없이 말라 일손 하나를 덜어 준다. 바깥바람이 차갑고 이불 밑에 불을 넣어도 발이 자꾸 바싹 마른다. 곁님 발뒤꿈치 껍질이 하얗게 일어난단다. 이불에 부스러기가 떨어진 듯하니 이불을 털자고 했다. 걷으려는 이불을 놔두라 하고 그대로 말아서 돌린다. 새집에 들어오기 앞서는 이불 하나 말리려면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얹고 걸쳤다. 새집에 들어오니 두레벗(조합원)이라고 이백만 원 하는 세탁기 닮은 건조기 한 대를 거저로 받았다. 빨래가 끝나면 꺼내어 옆에 옮겨 단추를 누른다. 꾸물거리다 보면 어느새 다 마른다. 일 마치고 와서 저녁에 빨아도 잠잘 때는 덮는다. 스무 해 서른 해 앞서 아이들을 키울 때 샀더라면 얼마나 수월했을까. 셋째 키울 적에는 이불을 자주 빨았다. 날마다 오줌을 싸서 옷하고 이불만 빨래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5. 물렁팥죽 첫째한테 안경을 언제 꼈는지 묻다가 두 동생 일도 물었다. 날이 추워서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쌀쌀맞다. “엄마가 떠올려야 할 걸 나한테 묻지 마.” “…….” 뾰족한 날에 베인 듯 아린 금 하나가 가슴을 타고 밑으로 살짝 스친다. 내가 어릴 때 우리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때리러 올 적보다 더 아프다. 둘째하고 셋째는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물음에 애써 글을 준다. 조금 앞서도 앞머리를 내릴까 말까 머리 손질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묻더니, 맞춤 때라 바빠서 그랬을까. 한마디 말에 왜 이렇게 기운이 다 빠지는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어린 날에 둘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여느 때보다 일을 일찍 마무리하고 백 킬로미터로 밟으며 작은딸 집에 갔다. 바쁘게 사느라 사진첩을 두고 온 일도 잊었다. 어느덧 여덟 해가 지나고 이제야 챙긴다. 마당에 들어서서 작은딸한테 비밀번호를 물으며 계단을 오른다. 땡 소리 나고 12층 문이 열린다. 길이 길다. 5.3.2호를 지나 문을 열려다 멈춘다. 한때 아이 달랜다고 내 집처럼 드나들던 비상구를 연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군데군데 있던 낡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4. 배꼽 서랍을 뒤지다가 주머니 하나 집어든다. 안이 훤히 보이는 봉지에 배꼽이 들었다. 하늘빛 집게에 꽉 물렸다. 내 몸에서 떨어진 끄트머리 쪽은 마른오징어처럼 누렇고 작다. 아기 몸에서 떨어진 배꼽줄은 까만빛이 감돌고 반질반질한 돌빛이 돌고 더 크다. 아무것도 없는 배꼽줄은 푸르스름하다. 아들이 태어나고 열 해 동안 내가 지니다가 따로 방이 생기고 책상을 들인 열 살 때 넣어 건네준 배꼽이다. 아들이 우리에게 찾아오기 앞서는 두 딸만 바라보고 키우려고 했다. 곁님도 나도 둘레에 아들 있는 벗이 부러웠지만, 배를 두 번이나 갈랐으니 꿈도 꾸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마음이 슬슬 바뀌었다. 일터에 잦게 찾아오는 쉰 살쯤에 이른 아줌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거기 앉아서 돈 몇 푼 버는 일보다 집안을 이어주는 일이 먼저다.” 아흔쯤 보이는 할아버지도 늘 같은 말을 했다. 하얀 수염에 삿갓을 쓰고 모시옷을 입었다. 지팡이를 바르르 떨면서 몸을 곧추세우고 다가왔다. “새벽 3시에 아들 만들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라”느니, “술을 한 잔 마시고 하라”느니, 바로보기 부끄러울 만큼 아들 낳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들려
[ 배달겨레소리 숲하루 글님 ] [내가 사랑하는 아이] 3. 코 남을 추켜세우는 일에 쩨쩨한 큰딸내미가 내 코에는 말씀씀이가 참으로 너그럽다. 턱 가까이 달라붙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본다. 거뭇하고 주름투성이인 얼굴을 살피면 뜨신 숨이 코로 훅 들어온다. “엄마 코는 아주 잘 생겨서” “어디가?” “틀, 생김새가 고친 듯해. 높이하고 기울기하고 코볼하고 크기가 그래. 오죽했으면 한참 멋을 부리는 일에 마음이 쏠린 원이한테 엄마 코를 고쳤다 하니, 한달음에 넘어갔잖아.” “너희들도 콧대가 있어 예뻐, 왜 그래” “원이가 엄마 몰래 뭔가 코에 맞았는데 안됐잖아 엄마처럼 안 된대.” “둘 다 낮은 코가 아닌데. 엄마 코는 안 높아.” “엄마 코는 안 낮아. 높거든.” “그래? 그라면, 네가 잘생겼다 하면 그냥 잘생긴 줄 알면 되겠네?” “응” 내가 아버지 코 닮았나, 하고 중얼거리며 돋보기를 밀며 마른손으로 더듬어 보고 쓱쓱 쓰다듬는다. 내 코가 잘생겼다는 말을 딸내미한테서만 듣는다. 오늘뿐 아니라 큰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듣는다. 제 코도 이쁘면서 왜 가만히 있는 내 코에 마음을 쏟을까. 한두 날도 아니고, 곰곰이 떠올려 보니 스무 해 앞서 코를 다쳤다. 그날